그라실리아누 하무스_<메마른 삶>을 읽고..
어멈이 옳을 것이다. 어멈은 항상 옳았다. 이제 어멈은 아이들이 커서 무엇을 할 것인지 알고 싶어 했다.
"소몰이꾼이 되겠지." 파비아누가 말했다.
비토리아 어멈은 질색하며 고개를 부정적으로 흔들었고, 그 바람에 하마터면 양철 트렁크를 떨어뜨릴 뻔했다._155p
20세기 브라질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그라실리아누 하무스'의 대표작이자 윌리엄 포크너 상 수상작인 <메마른 삶>이 국내 초역, 출간되었다.
표지는 황량하고 건조하다. 어디에도 발길이 머무르고 희망이 자리할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유랑자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불투명하고 명확지 않음이 가득하다. 사체가 썩는 내음이 진동하는 불모지, 카칭가를 헤매는 이들. 소몰이꾼 파비아누, 비토리아 어멈, 부모를 따르는 두 아이들과 충견 발레이아 그리고 곧 죽음을 맞이할 대형 앵무새. 그들은 뚜렷한 목적지가 없고, 누구도 그들을 반기지 않는다. 공중을 선회하는 독수리들만이 그들이 탈진하여 쓰러지기를 바랄 뿐.. 앵무새가 유명을 달리하지만, 지하에 묻히기는커녕 곧바로 남은 이들의 끼니가 되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헤매다가 당도한 곳은 '세르탕', 붉은 사막 혹은 황야라 불리는 곳.
파비아누와 그의 가족들은 새로운 거주지에서 어떻게든 정착하려 하지만 현실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탐욕스러운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뼛속까지 털어먹으려 하고, 정부/군인들 역시 빈자들을 폭압하고 영역 밖으로 내쫓으려 한다. 거장 그라실리아누 하무스는 철창에 갇히고, 진창에 빠져 뒹구는.. 황무지를 떠도는 가난한 이들의 모습을 거리를 유지하면서 담담히 그려낸다. 13개 장에서 다양한 이들이 거친 땅에서 쓰러지고 숨을 헐떡이다, 끝내 다시 일어서려는 분투기가 애달프고 쓸쓸하다. 가족과 다름없는 개 '발레이아'가 주인의 총에 맞은 채, 자신이 묻힐 곳을 찾아 힘겹게 기어가는 장면은 서서히 진행되고 세밀히 클로즈업된다. 주인이 나타나면 힘껏 물어버리겠다, 복수를 다짐하지만 눈앞에 어른대는 환영과 멀리 들리는 아이들의 울음만이 그의 최후를 기릴 뿐이다. 발레이아의 비참한 죽음은 함께 한 가족들의 미래를 불확실하게 흐리고, 끝없는 떠남을 예고한다.
그들의 꿈은 소박하다. 등이 배기지 않는 안락한 침대를 원하고, 일용할 양식과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만한 터전을 바랄 뿐이다. 허나 거대 자본과 공권력은 그들의 찢긴 주머니를 뒤지고, 어딘가에 정착하도록 놔두지를 않는다. 도주하다시피 짐을 꾸려 어딘가로 길을 떠나는 파비아누와 가족들. '덜 메마른 삶'을 찾아 떠도는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저 지평선 너머 어딘가, 자신들을 반기는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만한 낙원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실낱같은 그 희망마저 놓아 버린다면, 현재의 고통은 배가 될 것이고 죽음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기에..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낙관적인 미래에 대해 의논한다. 도시에 정착하면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학교에 보내 소몰이꾼이 아닌 다른 업을 찾게 도와야지.. 하는 이런저런 장밋빛 계획들과 청사진들. 그들이 밟는 땅은 여전히 메마르고, 허공에는 굶주린 독수리들이 맴돌고 있다. 서로에게 기대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오래도록 지켜보고, 무사함과 안녕을 바랄 수밖에 없다.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메마른 삶>은 조지 스타인벡의 역작 <분노의 포도>를 떠오르게 합니다. 자본의 횡포를 피해 어딘가로 떠나는 가족들의 행렬은 장례 의식처럼 비장하고 처절해요. 하지만 그들은 희망을 놓지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아요. 과연 그들이 당도할 곳은 젖과 꿀이 넘치는 낙원일까요? 아니면 메마르고 황량한 지옥일까요? 길지 않은 분량에 생경하고 낯선 브라질 향토를 배경으로 한 <메마른 삶>.
휴머니스트의 흄세 시즌 7 <날씨와 생활> 시리즈 중,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