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그때는 어항을 늘리기 전이라 수조 다이로 활용하는 책장을 완력으로 옮길 수 있었다.
30 큐브 어항이 추가된 지금은 옮길 엄두도 못 내겠지만..
30cm 가까이 틈이 벌어지자 우리는 너도나도 핸드폰 플래시를 켜고는 책장 뒤를 이 잡듯이 살폈다.
하지만 녀석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먼지와 머리카락이 엉킨 뭉치와 아이들 레고 블록과 누렇게 바랜 고무줄이 눈에 들어왔다. 난 선셋의 수색 작업을 포기하려다 마지막이다 싶어 기다란 스포이트 끝으로 먼지 뭉치를 휘저어 보았다.
그 순간 솔과 연,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선은 어머나, 하고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나 또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먼지를 두껍게 뒤집어쓴 회백색 유선형 몸체가 바닥에서 파닥파닥 튀어 오르며, 나 살아있소!라고 필생의 몸부림을 친 것이다. 틀림없는 선셋이었다. 그 상태로 얼마나 버텼는지 모르겠지만, 최소 20분 동안 일체의 물기 없는, 어둑하고 황량한 먼지 바닥에서 홀로 견딘 것이다.
몇몇 구피들의 흰 똥을 줄줄이 매달고 다녀서.. 내부 기생충이 의심되어 옴니쿠어 방역을 했어요. 어항에 방귀 차를 풀어놓은 것처럼 사방이 희부옇네요. 이 자반항에 선셋이 살아요!
쪼그만 녀석이 얼마나 공포에 질리고 두려웠을까. 난 아이들이 건넨 뜰채로 녀석을 굴려, 살살 끄집어내 그물에 담아서는 찰랑이는 간이 수조에 풀었다. 선셋은 흠뻑 젖은 댕댕이가 온몸을 털어 물기를 터는 것처럼, 도리도리 몸을 저어서는 엉긴 먼지를 훌훌 떼내었다. 우리 넷은 옹기종기 둥글게 모여 수조 안에서 어색하게 헤엄치는 선셋 구피 한 마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녀석은 잠시 휘청하는 것처럼 옆으로 드러누웠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아 위로 떠올랐다.
암흑에 휩싸인 먼지 지옥에서 무사 귀환한 선셋은 여전히 온 어항을 휘젓고 다닌다. 허나 우리는 안다. 녀석이 수면 위로 뛰어오르려 급가속을 하다가도 막판에 브레이크를 걸어 비스듬히 옆으로 선회한다는 것을..
녀석은 다시는 무모한 점프를 감행하지 않을 것이다. 어이없는 사고를 치고 급박한 위기에서 벗어난 후에야.. 자신이 이 비좁은 수조에서 십 센치만 벗어나도, 아득한 심연에 빠져 생을 마감할 수 있는 비루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을 테지.
책장 뒤 흙먼지 범벅이 되어 뒹굴던 인고의 시간은 선셋에게 암울한 트라우마로 남았으리라. 생존을 위해 먼지투성이로 몸부림치던 그 발악은 최후의 SOS 신호였다. 하늘이 도왔는지 천운이 따라 선셋은 끝내 살아남았고, 자신을 닮은 몇몇 유어들이 부쩍 자라 다른 어항에서 자유로이 헤엄치고 있다. 우리는 녀석을 요주의 구피로 선별해 특별 관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