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미세먼지로 날씨가 정말 안 좋다. 숨 쉬는 거 하나만으로도 신경이 예민해지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나마 집에서는 작년에 이사를 한 직후 사둔 공기청정기 덕분에 마음을 놓고 숨을 쉴 수 있다.
미세먼지와 함께 봄도 와서 날씨도 부쩍 따뜻해졌다. 매트리스 아래에 깔아두었던 전기 장판도 따로 정리해 장롱 안에 넣어 두었다. 겨울 이불조차 덥게 느껴지는데, 전기장판을 켤 리 만무하다는 생각에 얼른 정리했다. 정리하는 김에 올 겨울에 한 번도 입지 않았던 겨울바지와 장갑도 꺼내서 헌옷 수거함에 넣었다.
또 한 번의 계절이 바뀌는구나, 싶다.
5.
출근길에 미세먼지 마스크를 끼다 문득 첫 회사 생각이 났다. 정확히 첫 회사 그 자체는 아니고, 첫 회사가 있던 사무실 빌딩 얘기다.
첫 회사는 오피스 빌딩에 세 들어 있는 작은 회사였는데, 옆 사무실의 회사는 의료용품을 납품하는 곳이었다.(도매 혹은 소매?) 그 회사는 늘 정시 출퇴근을 철저히 지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다니던 곳은 9시 출근 6시 반 퇴근 체제였는데(평균 근로시간보다 30분이 더 김), 늘 그 회사는 6시 땡 하면 전 직원이 나와 사무실 문을 잠그고 집에 갔다.
그러던 의료용품 회사가 아주 심하게 야근을 한 때가 있었는데, 바로 2015년의 메르스 사태 때였다. 호흡기로 메르스가 옮을 수 가능성이 있다는 뉴스가 퍼지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마스크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KF 수치라는 게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약국과 편의점에서 구입하려 했지만 전부 매진이어서 구입을 못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한 영향에 의료용품 회사는 며칠 내내 야근을 하였다. 마스크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야근을 하던 회사는 메르스가 잠잠해지면 다시 9 to 6 근무체제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우리회사는 겨울 시즌(11월 ~ 3월)에 야근이 정착되며 9 to 9이 되었다.) 그 회사는 지금도 한창 바쁘겠지? 그때처럼 직원들이 야근하고 있을지, 아니면 매년 찾아오는 미세먼지에 익숙해져서 여전히 정시 퇴근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6.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은 그게 어떤 장르든, 자신의 작품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그게 노래든, 소설이든, 만화든간에 말이다. 결코 숨길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할까.
대학 시절 단편 영화를 만드는 과제를 한 적이 있는데, 내가 거의 모든 작업을 했었다. 시나리오도 물론 내가 썼는데, 골자는 엉성한 러브스토리였다. 한참 줄거리를 짜는데, 어쩐지 자연스레 결론에서 주인공 두 사람은 헤어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게 되었다.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음에도 손이 그렇게 움직였다. 처음 쓸 때부터 이야기의 목적이 이별처럼 느껴졌다.
그때를 떠올리며 취향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영화에 대한 취향이 까다롭지 않아 대부분의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편이지만, 그런 나에게도 '유독 더 좋은' 영화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곧 취향일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는 '쿵푸허슬'이다. 다른 사람들은 웃으며 재미있게 봤다는 그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조금 서글픈 기분이 든다. 주성치의 영화는 늘 그렇다. 밝고 유치하지만, 쓸쓸하다. 그 쓸쓸함이 좋았다.
주성치가 러브스토리를 쓴다면 그것의 결말도 결코 행복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7.
회사일로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고, 회사 특성 상 원래부터 해야 하는 날이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밤 12시가 넘는 시간에 퇴근을 하였는데, 정말로 피곤했다. 다음 날은 오후 출근으로 조정되어 아침에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음에도 피곤이 가시질 않았다. 일상적인 삶의 패턴이 조금 뒤틀린 것 뿐이었지만, 그것은 의외로 꽤나 큰 체력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규칙적이고 루틴한 일상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많이 지켜주는 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8.
얼마 전 트위치 방송을 보는데, 오랜만에 슬램덩크의 OST를 듣게 되었다. 다들 잘 아는 박상민의 'crazy for you'(뜨거운 코트를 가르며~~)가 아니라 엔딩곡인 '너와 함께라면'이었다. 노래 그 자체도 좋지만, 자연스레 슬램덩크를 보던 초~중학교 때 즈음을 떠올리게 하는 몽글몽글한 감성이 좋았다.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랄까.
더불어 그 시절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던 화목했던 우리 가족이나, 사이 좋았던 친구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별다른 사고나 불행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 시절을 그리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워할 수 있는 과거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큰 행운일 것이다.
9.
여자친구가 "함께 일하는 동료의 나이가 엄청 어려! 몇 살이게?" 해서 내가 "90!"이라고 답했는데, 생각해보니 90년생이 올해 서른이어서 서로 엄청 웃었다. 내가 생각하는 어린 나이의 동생들이 90년생인데, (대학 시절 함께 알바하는데 친해진 동생들이 90년생이었다.) 그 애들이 벌써 서른이라니! 새삼 나이듦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80년대 중반에 태어나다보니(86년생) 어쩐지 심리적으로 80년생까지는 형님 누나, 89년생까지는 또래같고, 90년생 이후로는 한참 어린 동생들로 느껴진다. (같은 원리로 79이상은 어른처럼 느껴짐) 99년에 중학생이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90년대도 그닥 옛날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벌써 20년 전인데도 말이다. 반면 80년대는 정말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어려서 본 34살은 정말 끔찍히 나이가 많은 어른들로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의 난? 적어도 24살 이후로 나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 처럼 느껴진다. 기준이 24살인 이후는 24살에 전역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할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는 단순히 쭉 늘어서 있는 '세월'에 인간이 '숫자'라는 관념을 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 의미 없던 소리의 파장에 계이름을 붙이며 음악이 탄생한 것처럼. 숫자와 나이가 없었다면, 그 모든 세월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어떨 때는 그런 숫자와 나이가 참으로 얄밉다가도 어쩔 때는 무척 고맙기도 하다.
나이를 먹게 되면서 옷을 입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원래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옷이 몇 개쯤 있었는데(위 베어 베어스, 피카추, 심슨 등등) 이젠 그런 옷들을 집에서만 입는다. 나이 먹고 주책 떠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귀여운 것들이 좋다) 물론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을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은 사람을 비웃을 권리도 없다. (그 옷이 조금 이상하다고 해도)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세상엔 분명히 '나잇값'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옷은 물론 말이나 행동까지 말이다.
나는 아직도 운동화 중에서도 스니커즈 느낌의 신발을 가장 좋아하는데, 요즘은 문득 이런 신발을 언제까지 신어도 좋을까 고민할 때가 있다. 이는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나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싶다. 어리거나 젊게 살고 싶어서 그네들의 말을 따라하고, 그네들이 입는 것들을 따라 입고 싶지는 않다. 34살의 34살을 살고 싶다.
10.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내가 생각했을 때 그건 좋은 사람이다. 글은 곧 그 사람 그 자체, 혹은 그 사람의 생각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그럼 좋은 글은 어떤 글일까? 나 자신의 기준에서 좋은 글이 갖춰야 할 것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진솔함'이다. 진솔하다는 것은 나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다가갈 수는 없다. 이는, 좋은 사람은 진솔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생각에는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이 곧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삶을 사는 사람만이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여자친구와 광화문 근처를 걷다가 함께 새똥에 맞았다. 서로의 머리와 옷에 묻은 새똥을 물티슈로 닦아주며, '이것도 사랑이겠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