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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로 돌아가긴 너무 늦었다.

기다리며, 기억하고

by 적적

대형마트에 들어서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필요한 물건들은 메모해 둔다. 집안에 떨어진 혹은 얼마 남아있지 않은 물건들을 기억해 둔다. 거품을 일으키던 비누 조각이 너무 작아져 있다. 이제 한두 번 짜내면 치약은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이다.

시식 코너 앞을 서성거린다. 가장 작은 종이컵 안의 음식을 들여다보고 냄새를 맡아보며 작은 이쑤시개로 콕 찔러 입을 오물거리며 삼킨다. 들고 있어 종이컵과 이쑤시개는 시식대 옆에 버린다.

시식 코너에서 먹어 본 음식들은 늘 매혹적인 건 나뿐인지도 모른다. 자꾸 뒤돌아보며 망설이는 것도. 이틀 동안 봄을 먹었던 것 같다. 따스하고 손이 시리지 않으며 흐린 하늘이지만 입고 있던 겨울 외투가 덥다고 느껴지던 시식코너에서 맛보았던 음식들.


바람이 솜털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았다.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겨울이 머물러 있다. 바스락거리던 눈길을 걸으며 들었던 낮고 차분한 숨소리, 하얀 입김 사이로 얼어붙던 조용한 말들, 그리고 손끝을 스쳐 가던 싸늘한 공기의 잔상. 아직도 그 모든 감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잔영을 그리워한다.

모두가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는 동안, 여전히 지난 계절의 조각들을 손끝에 쥔 채 머물러 있다. 따뜻한 햇볕이 노란 꽃잎처럼 스며드는 거리를 걸으면서도, 마음속 어딘가에는 한겨울의 잔상이 그림자처럼 남아있다. 얼어붙은 창문에 손끝으로 그림을 그리던 순간, 새하얀 입김이 유리창 위에 한 줄의 시처럼 맺히던 기억, 깊은 밤 따뜻한 방 안에서 들리던 바람 소리와 함께 퍼지던 촛불의 흔들림, 새하얀 눈이 세상을 감싸 안으며 전하는 적막한 평온함. 그 시간은 마치 영원히 멈춰버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떠나보내기가 쉽지 않다.



겨울로 돌아가긴 너무 늦었다는 것을. 시간은 스며들듯 흘렀고, 계절은 부드러운 손길로 얼굴을 바꿀 것이다. 차가운 바람 대신 살랑이는 산들바람이 볼을 스치고, 앙상했던 나뭇가지에는 연둣빛 새싹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아무리 겨울을 그리워해도, 자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봄을 향해 걸어간다.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떠나온 계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나간 계절을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간다. 그리움은 추억의 결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고, 아쉬움은 지난 시간을 더욱 빛나게 한다.



아침엔 눈이 온다는 예보를 듣는다. 봄눈이 될 것이다. 봄과 눈 사이엔 꽤 먼 거리가 있다. 그렇게 거리가 멀어진 일상엔 계절의 이름이 특별히 붙여진다.

창문 밖으로 흐린 하늘 한편이 예고편처럼 상영된다. 예고편은 오늘 날씨의 하이라이트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비록 내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겨울의 서늘한 잔향이 맴돌지만, 계절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봄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스며든다.



겨울이 남긴 모든 순간을 가슴 깊이 묻은 채, 나는 서서히 다가오는 봄을 맞이한다. 겨울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지만, 차가운 바람이 남긴 기억들은 얼룩처럼 내 안에 남아 빛난다. 언젠가 다시 겨울이 문을 두드린다면, 나는 그 차가운 공기를 반가운 친구처럼 맞이할 것이다.


지금은, 차가운 봄바람 속에서 천천히, 조용히 계절의 속삭임을 따라 걸어가야겠다.


대문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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