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14화

49일째 꽃잎.

반복되는 봄, 되풀이되지 않는 감정

by 적적

햇살이 말을 아끼는 시간. 벚나무 아래, 느릿한 그늘이 반듯하게 하루치 고요를 펼쳐 놓는다. 태양은 완전히 떠오르지 않고, 바람은 결정적인 말을 피하는 사람처럼 머뭇거린다. 그 사이로 공기 중의 꽃가루들이 언어화되지 못한 감정처럼 둥둥 떠다닌다. 해석을 거부하는 침묵들. 물기 어린 바람은 방금 누군가가 급히 떠난 자리의 옷자락처럼 남아 맴돈다. 눈에 닿기 전, 이미 사라진다.



냄새조차 유예된 봄날의 끝. 흐린 정오, 흙냄새와 꽃냄새 사이에 묻힌 정체불명의 향. 누구의 체온도 완전히 담지 않은, 반쯤 식은 온기. 건조한 웃음처럼 떨어지는 꽃잎. 아무 의미도 남기지 않은 채, 바닥에 떨어지는 사소한 죽음들. 누구도 울지 않는 장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퇴장. 봄은 죽음을 연습하는 계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무는 다음 순서를 위해 자신을 덜어낸다. 흙은 무엇이든 삼킨다. 항의도 유언도 없이. 어떤 것도 두 번 피어나지 않는다. 매화는 피었고, 벚꽃은 지고, 모란은 고개를 숙인다. 순서처럼 보이지만 단 한 번도 같았던 적 없는 시간의 배열. 과거로 되돌릴 수 없는 단절. 잎맥이 일렁이던 기억도, 꽃술에 머물던 햇살도,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봄은 점점 짧아져

49일. 불교에서는 죽은 이의 넋이 저승으로 향하기 전 머무는 유예의 시간. 이승과 저승 사이, 무게 없는 발자국이 남는 공간. 그 안에서 사람들은 울고, 기억하고, 놓아준다. 생의 기세가 사라지고, 이름이 타인의 입에서 지워지는 시간. 봄도 마찬가지. 찬란함과 스러짐 사이, 그 어디에도 완전히 발을 딛지 못한 계절. 순간적으로 현존하면서, 끊임없이 부재를 예고하는 빛.

기다림이 시작되기 전의 희미한 설렘. 만개하기 직전의 정지된 숨결. 지는 순간의 쿡 찌르는 확신. 그리고 곧 잊혀지는 감촉. 반복되는 것 같지만 전혀 같지 않은 감정의 안내서. 매해 봄은 돌아오지만, 그 봄은 언제나 타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온기.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기분.

벚꽃은 피면서 사라진다. 화려한 절정과 동시에 무너지는 시작. 생의 극단으로 올라서는 찰나, 그 자체로 추락의 방향이 결정된다. 한 줄기 바람에도 산산이 흩어지는 존재. 전성기의 순간, 시들기 시작한다. 그 누구도 막지 못하는 감정의 기울기. 가장 빛나는 얼굴에 가장 깊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생이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는 생.



누군가 봄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반드시 상실을 예감하고 있다는 증거. 기쁨이라는 감정은 늘 끝을 감지하고 있다. 꽃잎을 쥐는 손이 조심스러운 건 그 무게가 아니라, 그것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손끝의 감촉마저 허공으로 흩어질지 모른다는 불안. 감정은 붙잡는 순간부터 증발을 시작한다.

봄은 생의 유예이자 죽음의 전초. 꽃은 흙을 향해 떨어지고, 뿌리는 다시 피어나지 않는다. 해마다 반복되는 듯한 개화와 낙화. 그러나 한 송이도 같은 방식으로 피고 지지 않는다. 꽃구경이라는 말 안에 이미 장례의 냄새가 들어 있다. 웃음소리와 플래시 사이로 흘러나오는 고요한 조문. 축제와 장례의 경계는 흔들린다. 환희와 상실이 동시에 터지는 장면.



기억은 49일만 남는다. 그 이후의 사랑은 다만 회상. 생생하지 않은 기억. 뿌연 윤곽과 과장된 감정. 봄도 끝나고 나서야 존재가 선명해진다. 부재로 드러나는 실체. 무언가 떠난 자리만이 진짜였다는 감각. 마치 어떤 사람처럼. 그가 있을 때보다, 떠난 후가 더 진하게 남는 것처럼.

하루 단위로 줄어드는 햇빛, 날마다 옅어지는 향기, 점점 투명해지는 풍경.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그걸 모른 척하고 웃고, 어떤 이는 이유 없이 울고, 또 어떤 이는 지나가는 계절 속에서 자기 얼굴을 본다. 상실이 계속될 것이라는 전제를 안고 살아가는 몸. 말없이 건네는 인사, 숨기듯 건네는 작별. 무표정한 얼굴 아래, 떨리는 눈꺼풀.



거리에 놓인 진달래 화분. 버스정류장에 떨어진 개나리 잎. 전철역 입구에 맺힌 이슬. 벚꽃 잎이 흩날리는 신호등 아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 그들은 꽃잎이 아니라, 지나간 계절을 바라본다. 그날의 공기, 그날의 이름, 그날의 눈빛. 아무 말 없이 지나친 어떤 얼굴. 벚꽃보다 오래가는 감정들.



49일. 누군가를 잊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 혹은 가장 오래 머무는 시간. 그 시간 동안 인간은 살아 있지 않다. 떠난 자와 함께 머문다. 봄도 마찬가지. 그것은 살아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계절. 실은 잠시 죽어 있는 시간. 감정은 되감기 되고, 모든 감각은 조용히 멈춰 선다. 봄의 무대 위,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다.

꽃이 진다고 끝이 아니다. 남은 꽃자국, 아직 떨어지지 않은 그림자, 가지 끝에 매달린 기억의 껍데기. 아무 말 없이 남겨진 색. 생은 그렇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자리를 비운다. 누구도 묻지 않은 질문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변화는 그 안에 숨겨진다. 뿌리는 자라고, 물은 흐르고, 몸은 기억을 지운다. 무언가가 바뀌는 순간은 언제나 조용하다. 언젠가부터 달라진 것. 말할 수 없는 거리감.



봄날의 장례는 거창하지 않다. 바람 한 줄기, 빛 한 줌, 혹은 짧은 눈맞춤 하나. 어떤 문장 하나. 어떤 목소리. 그렇게 계절은 떠나간다. 기억되지 않을 이름들 속으로 스며든다. 말보다 빠른 이별의 방식.

누구도 정확히 언제 봄이 끝났는지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누가 언제 죽었는지를 놓쳐버리는 일처럼 모호하다. 그날도 똑같은 시간에 일어났고, 똑같은 전철을 탔으며, 똑같은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이미 지나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벚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은 건 가벼운 허기와 사라진 향기, 그리고 지난 계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다는 막연한 감각. 무엇이었는지 끝내 알 수 없는 감정. 손에 남지 않는 감촉.



봄은 매번 비슷한 옷을 입고 돌아오지만, 한 번도 같은 얼굴로 머문 적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 그 사람 같았으나 아니었고, 아니었으나 그 사람 같았다. 그런 착각이 계절을 붙든다. 착각만이 기억을 유지시킨다.


49일이 지나면 잊혀야 한다. 기억이 끈질기게 남아도, 의식은 그것을 포기한다. 그렇게 삶은 이어지고, 봄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계절은 자신을 기억하는 자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모든 봄은 제사를 지낸다. 피고 지는 모든 것에게 묵념을 바친다. 조용한 축제. 조용한 죽음. 그 사이의 빛. 환희와 상실이 동시에 존재하는 풍경. 축복과 장례가 나란히 놓인 침묵.

사라진 것들을 붙잡기 위해 인간은 사진을 찍고, 시를 쓰고, 길을 걷는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붙잡히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잊히지 않는다. 어떤 계절은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봄날의 사십구재는 끝났고, 마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묶여 있다.



피지도 못하고,

지지도 못한



제법 우울한.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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