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물의 온도, 낮은 숨결

문장은 마르지 않는 붓자국이다

by 적적

물방울이 떨어지듯 문장이 내려앉는다. 처음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 캔버스였다. 단어 하나 없이, 숨소리조차 없는 장막 속에서 손끝의 망설임이 긴장을 틀어쥐고 있다. 붓을 드는 일은 생각보다 더 조용하고 느린 일이다. 세상의 모든 정물은 침묵하고, 그 침묵을 바라보는 눈은 마치 오래된 극장의 조명처럼 더디게 켜진다.


대상은 움직이지 않는다. 과일 바구니 안에서 배는 썩어가고, 사과는 점차 색이 바래간다. 병은 유리 속을 가득 채운 채로 빛을 반사하고, 책은 반쯤 펼쳐진 채 모종의 단서를 숨긴다. 그러나 그 어떤 것 하나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것들이 놓인 방식,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어둠의 각도, 그것들을 뚫고 나오는 빛의 기울기만이 말한다. 정물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라보는 이는, 보지 못한 틈을 더듬어야 한다.



글쓰기는 바로 그 더듬기의 연속이다. 정물화 앞에서처럼, 문장 앞에서도 모든 것은 이미 거기 있다. 사물은 제자리에 있으며 시간은 멈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장을 써 내려가는 동안, 실제로는 아무것도 멈추지 않는다. 빛은 서서히 바뀌고, 어제 보았던 그림자의 위치는 오늘 조금 달라져 있다. 그것을 알아채는 눈, 그것을 언어로 붙잡으려는 감각, 그것이 글쓰기의 시작점이다.



형체가 불분명한 단어들은 처음엔 물감보다도 더 흐물흐물한 존재다. 색깔이 없고, 향도 없고, 감촉조차 없다. 단지 마음 어딘가에서 저릿하게 맴도는 하나의 기척. 그것이 붓 끝에 올라오기까지는 많은 실패가 필요하다. 어느 단어는 너무 붉어서 화면을 집어삼키고, 어느 표현은 너무 흐릿해 아예 보이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수정을 한다. 다시 덧칠을 하고, 덧칠 위에 또 덧칠을 한다. 가끔은 마음에 들지 않는 전체를 지워버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글은 켜켜이 쌓이고, 문장은 자신도 모르게 농도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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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어요. 훔치고 싶은 문장을 파는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프로필은 당신과 나 사이엔 너무 긴 설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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