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끝내 말하지 못한 것들을 말하는 방식
가장 오래된 은유는 ‘시간은 강물처럼 흐른다’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강물은 흘렀고, 시간은 서 있었다. 시곗바늘만 돌아갔다. 시간은 은유를 빌려 스스로를 이해시켜야 했다. 이해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시간에 형태를 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려는 고집은 결국 보이는 것의 이름을 훔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그렇게 은유는 세상의 이치를 차용하며 세상의 껍질을 발라먹는 기술이 되었다.
모든 고통은 타인의 고통을 빌려야만 설명되었다.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다'는 말은 실제로 심장을 해부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과 상실을 물리적인 고통으로 바꾸는 치환의 기술이었다. 언어는 직접적인 경험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존재했고, 그 무력함을 보완하기 위해 은유는 필연이 되었다. 직진할 수 없는 고통은 우회로를 찾아야만 했고, 그 우회로는 언제나 다른 사물의 이름이었다.
전쟁은 바둑이 되었고, 사랑은 불이 되었으며, 절망은 구름이 되었다. 아무것도 닮지 않은 것들이 서로를 닮았다고 말해질 때, 언어는 도약을 한다. 그것은 진실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부재한 자리에 피어나는 착시의 꽃이었다. 은유는 결코 정확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호함을 무기로 삼았다. 그 모호함이 문장을 생존하게 했고, 독자는 그 모호함 속에서 각자의 기억을 끼워 넣었다. 세상은 은유 없이는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다. 단 한 감정도 온전히 건드릴 수 없었다.
심해의 오징어는 빛을 내는 세포를 가져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를 주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본질을 감당할 수 없는 감각을 대신해, 빛나는 단어들을 몸 밖으로 뿜어내야 했다. 그것이 시였고, 소설이었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글이었다. 그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결국 은유였다. 세상은 말해지는 방식으로만 존재했고, 그 말해짐의 대부분은 비유와 암시의 언덕을 넘어야 했다.
도시는 숲이 아니었지만, 도시를 ‘콘크리트 정글’이라 부르는 순간, 사람들은 빌딩 숲 사이를 걸으며 길을 잃은 짐승처럼 호흡했다. 기계음과 배기가스, 인공조명 속에서도 풀잎을 상상했고,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에 젖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숲의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 되었다. 그 거짓된 이미지 속에서만 위로받는 방식. 그 방식의 또 다른 이름이 은유였다.
어떤 시인은 감정을 비유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움은 길다’고 했고, ‘고통은 매운맛’이라고 썼다. 길이나 맛으로 감정의 모양을 그리는 방식.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조각하는 존재’라는 증거였다. 언어는 조각칼이었고, 은유는 조각의 방향을 결정하는 손놀림이었다. 감정을 직접 다룰 수 없기에, 감정은 항상 무언가로 만들어져야 했다. 음악, 색, 무늬, 또는 눈빛. 언어가 아니어도 좋았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엔 설명이 필요했고, 설명은 늘 다른 것의 이름을 빌리는 방식으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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