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보다 깊은

깊은 곳의 수면은 검은.

by 적적

어릴 적, 어떤 이들은 우물에 빠진다. 일부러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 후의 삶은 빠지기 전과 확연히 다르다. 물속에 잠겨 있는 동안,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깊이와 시간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시간, 그것은 직선적인 과거와 미래를 깨뜨린다. 우물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안에서 자신을 목격했다는 사실만 기억한다.


물 한 바가지는 무게로 환산되지 않는다. 두 손으로 떠 올린 물은 단지 무게보다 훨씬 더 미세한 감각으로 존재한다. 감촉, 온도, 흔들림, 투명함, 그리고 순간적으로 뒤틀리는 빛. 우물 속 깊은 곳의 수면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 모든 것을 비춘다. 투명하다는 말은 사실 가장 많은 것을 감추는 방식이다. 보는 자가 비춘다는 것을, 보는 자는 거의 잊고 산다.


돌을 던지면 진동은 사방으로 퍼진다. 물은 그 진동을 기억한다. 한 번 일어난 파장은 다시는 이전의 평면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시간은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흔들린다. 돌은 이유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 돌을 던진 손도, 의도도, 타이밍도 어딘가에서 출발한다. 물속의 수면은 그것을 감지하지만 판단하지 않는다. 흔들릴 뿐이다. 그것이 무언가를 품고 있는 방식이다.



우물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감각과 같다. 한 번도 쓰인 적 없는 언어처럼 존재하지만, 누구보다 오래된 기억을 품고 있다. 누군가는 그 우물 속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눈빛이 얼마나 낯선지 깨닫는다. 이물감은 거울보다 더 거울 같은 방식으로 드러난다. 거울이 표면을 반사한다면, 우물은 그 깊이로 반사한다. 깊이는 비추는 것이 아니라, 삼키는 것이다.



누군가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다가 자기 얼굴을 잃는다. 너무 오래 바라보다가 더 이상 표면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게 되면, 그때부터가 진짜다.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부터 무언가가 빠져나가게 되는 순간. 기억의 가장자리나, 감각의 뒷면, 혹은 이름을 잃은 채 떠도는 감정의 찌꺼기 같은 것들. 그것이 올라온다. 조용히, 흔들림 없이.



수면이 평온하다는 것은 외부의 움직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안쪽이 더 복잡하고 더 많은 것을 품고 있기에 겉은 고요해질 수밖에 없다. 우물은 안으로 움직이는 세계다. 모든 물은 중력을 향해 떨어지고, 그 방향은 곧 시간의 흐름과 겹친다. 하지만 우물은 그 흐름을 붙들어 둔다. 가두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방식으로.



기다림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감정이다. 우물은 기다리는 법을 안다. 사람은 기다리지 못한다. 대신 갈증을 말한다. 목이 마르다는 감각은 우물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무엇이 결핍되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한 번이라도 채워졌던가를 묻는 몸의 기억. 그 기억은 감각보다 깊다. 생존은 결핍보다 충만의 기억으로 유지된다.

어떤 날은 우물의 물이 마르기도 한다. 마른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면은 지하수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지하수는 땅의 깊이를 따라 존재하는 시간의 잔류물이다. 누군가의 발소리, 뿌리의 흔들림, 아주 오래전 부러진 가지의 잊힌 흔적까지. 물은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증발시키지 않는다. 수면이 다시 차오르면, 그 안에는 과거가 담겨 있다.


거울은 현재만 비춘다. 우물은 현재와 과거의 틈을 비춘다. 비춘다는 것은 꼭 보여주는 일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우물 속 수면을 보며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떠올린다. 기억은 흔히 선명하지 않다. 대개 흐리며, 왜곡되고, 변형되며, 서로의 가장자리에서 얼룩진다. 우물 속의 이미지도 그런 식이다. 흔들림을 통해 보이기 때문에 더욱 정확하다. 왜곡은 진실보다 진실에 가까운 방식을 알고 있다.



비가 많이 온 날, 우물은 넘친다. 넘친다는 건 경계를 잃는다는 뜻이다. 평소에 단단했던 테두리, 질서, 이름, 용도. 모든 것은 모호해진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언어, 익숙한 감정이 다시 낯설어지는 순간, 그 순간에 우물의 얼굴이 생긴다. 본래 얼굴 없는 존재였던 것이, 물이 넘침으로써 드러난다. 드러난다는 것은 누군가가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목격된 자아는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종종 비 오는 날, 물웅덩이 앞에서 멈춰 선다. 비가 고인 곳은 전부 우물의 모방이다. 진짜 우물은 보기 드물지만, 진짜 같지 않은 우물은 어디에나 있다. 눈동자 속에, 사진 속에, 흘러간 창문 밖에. 그리고 그런 표면은 모두 다 거울처럼 비춘다. 다만, 본다는 감각보다 잊는다는 감각으로 더 가까이 간다.



잊는다는 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남는 것이다. 너무 가까워서 인식되지 못하는 형태. 우물 속 수면에 비친 얼굴도 그런 식으로 흐릿하다. 그 흐릿함이 오히려 정확하다. 선명한 기억은 흔히 꾸며진 것이고, 흐릿한 기억은 종종 본질을 건드린다. 흐릿함은 시간과 함께 이동하기 때문이다. 수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그 그림자는 천천히 물결에 따라 찢어지며 흘러간다. 본다는 것은 때때로 찢어진 그림자에 가까운 일이다.


낮에는 하늘이 비치고, 밤에는 어둠이 비친다. 하늘은 실재하고 어둠은 부재처럼 느껴지지만, 우물의 입장에서는 둘 다 같은 것이다.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빛이든 어둠이든 반사되는 건 표면일 뿐이다. 진짜는 그 아래, 흔들림 뒤, 깊이 속에 있다. 수면이 평평해질수록 진짜는 더 멀어진다. 그래서 가끔은 돌을 던져야 한다.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예측 불가능하게.



어떤 존재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드러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처럼. 거울은 침묵하지만, 우물은 가끔 속삭인다. 아주 오래된 물의 언어로. 그것은 문법도 없고, 번역도 불가능하며, 의미보다 감각에 가까운 방식이다. 피부가 그걸 먼저 알아챈다. 손끝이 물에 닿기 전에, 공기 중의 냄새가, 흙의 냉기가 먼저 반응한다. 그 반응은 설명되지 않지만, 몸은 기억한다.


어쩌면 모든 기억은 우물 속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망각은 수면을 잃는 일과 관련 있다. 말라버린 우물은 기억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차오를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빗물이 모이고, 누군가 발끝으로 그 주변을 서성인다면.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모여 하나의 수면을 만든다. 그 수면은 다시 누구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다.



우물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 대신 비춘다. 그 비침 속에서 질문이 태어난다. 왜 그렇게 흔들렸는지, 왜 그렇게 깊었는지, 왜 그렇게 오래되었는지. 질문은 대답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어떤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수면 아래 남는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누군가의 눈동자 속에서 그 질문이 반짝일 것이다. 마치 거울처럼.



아니, 우물처럼.



사진 출처> pinterest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3화꽃은 잎을 다시 입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