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임은 예고편이다

여름, 도시는 유영하고 사랑은 지연된다

by 적적

언젠가부터 이 도시의 여름은 수족관 안쪽 유리벽을 닮았다. 손끝을 대면 살짝 미끌거릴 것 같은, 다 자란 물기들이 골목을 감싼다. 간헐적으로 켜진 형광등이 창백한 잉크처럼 인도 위에 쏟아지면, 전날 내린 소나기의 막냇물은 아직도 배수구를 향해 천천히 기어가고 있다. 스펀지처럼 숨을 쉬는 보도블록, 그 위를 천천히 떠다니는 무채색 구두, 바닥에 떨어진 버블티의 검은 타피오카들이 마치 퍼져 죽은 송사리처럼 납작하다.



누군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가 어딘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인다. 저마다의 탈주선은 스스로를 향하지 않는다. 사랑도, 증오도, 그 어디쯤에서 물기를 잃고 거품처럼 끓어오르다 사라진다. 여름은 늘 같은 얼굴로 왔다가 같은 얼굴로 떠난다. 그렇게 떠나는 것을 구경하는 일만이 유일한 생활이 된다. 지나간 얼굴, 버려진 그림자, 깨진 유리컵, 메마른 욕망.


가장 더운 시각을 넘긴 일요일 저녁의 공기는 부유하는 수면 위의 정적처럼 희미하다. 습기와 분진, 플라스틱 냄새가 미묘하게 뒤섞인 공기가 이마와 볼을 흘러내린다. 살갗 위에 붙은 땀과 미세먼지는 작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인다. 반짝임은 살아 있다는 신호이자,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고편이다.



횡단보도 앞 신호등은 여전히 제시간에 맞춰 깜빡이지만, 그 깜빡임마저 무표정하다. 초록불이 켜지면 사람들은 열대어처럼 분주히 건넌다. 그들의 뒷모습엔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는다. 표정은 건널목을 넘기 전 이미 버려졌고, 유리벽 뒤편을 지나가듯 무감한 걸음만이 남는다. 웃음기는 마른 수조의 바닥처럼 갈라졌고, 말들은 물속에서 일렁이는 그림자처럼 전달되지 않는다.



주차된 차량의 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다소 왜곡되어 있다. 이마가 길게 눌리고 눈이 좌우로 벌어진다. 이곳의 공기층이 일종의 수면이라면, 얼굴은 언제나 그 위에서 뒤틀린다. 구두 소리는 물방울처럼 튀어나왔다가 금세 가라앉는다. 카페의 테이블마다 붙은 사람들 사이엔 투명한 막이 쳐진 듯 소리가 번지지 않는다. 대화의 흐름도, 감정의 깊이도, 일정한 밀도 이하로는 침투하지 못한 채 흩어진다.


무언가를 마시는 사람들의 손목엔 계절의 파편이 박혀 있다. 미묘하게 달아오른 피부, 지나간 일광욕의 흔적, 멍처럼 번진 파스텔 색의 네일아트. 그들은 끊임없이 젖는다. 아이스커피, 콜라, 물, 맥주, 청량한 액체들이 입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숨결로 흩어진다. 마시고, 식히고, 증발시키는 일의 반복. 사랑도 그렇게 증발하는 것이었을까. 냉기를 머금은 플라스틱 빨대 하나만으로도 계절은 몇 초간 더 참을 만해진다.



거리에는 이름 없는 향이 떠돈다. 하수구 냄새, 사람의 땀, 향수, 길거리 음식, 눅눅한 나무 벤치에서 나는 곰팡이 냄새. 어느 하나도 온전히 기분 좋은 냄새는 아니지만, 그들의 혼합이 도시의 여름을 증명한다. 그리고 증명은 이 거리의 모든 사물들로부터 살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가로등 아래 멈춘 사람의 입꼬리, 신발 끈을 매는 소년의 허리 각도, 자판기에서 떨어진 캔음료의 온도, 담배 연기를 허공에 그려 넣는 손의 방향.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고유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징후다.



누구도 물속에 있다고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물속에 있는 듯 행동한다. 그건 주관이 아니다. 이 도시에선 시선조차도 물속을 유영하는 물질처럼 느리게 흐른다. 어떤 시선은 깊은 곳에서 올라와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어떤 시선은 마치 반사된 빛처럼 어깨를 타고 떨어진다. 진짜를 보는 게 아니다. 대개는 착시를 본다. 빛의 굴절과 수면의 떨림, 마음의 기울기 같은 것들이 만들어낸 환상.



어느 순간부터 정류장에 앉은 사람들의 옆모습이 붕 떠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다리가 지면에 닿아 있지 않은 채, 의자에 반쯤 걸친 자세로 공중을 스윙하는 것이다. 신체의 일부가 허공에 매달려 있다는 감각은, 지상에서의 삶이 완전히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일종의 부유물처럼 정류장과 벤치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들의 눈빛은 조금씩 어긋나 있다. 누구도 같은 방향을 보지 않는다.



어느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리며 물이 찬 귀퉁이에 멈춘 한 마리 붉은 열대어처럼 몸을 고정시키는 순간이 있다. 그 짧은 정지 속에 도시 전체가 쏟아져 들어온다. 등 뒤로 지나가는 전동 킥보드의 바퀴 소리, 바로 옆에서 울리는 전화벨, 상점 유리문이 닫히며 튕겨 나온 바람, 도로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이 번져가는 속도. 모든 감각이 일시에 수조 안으로 흘러들며, 붕 떠 있는 정신의 중심을 뒤흔든다.


어떤 저녁은 뼈처럼 단단하고, 어떤 저녁은 젤리처럼 흐물거리며 감각의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다. 7월 20일의 저녁은 그 두 사이 어딘가였다. 단단하지도, 흐물거리지도 않으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자세만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 기다림은 대상을 갖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가 어항 밖에서 이곳을 들여다볼 것이라는 가능성, 그 시선의 투과를 막을 수 없다는 자각. 자신이 유리 벽 너머로 관찰당하고 있다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모든 존재를 얼어붙게 만든다.



진열장 속의 물건들이 팔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점점 빛을 잃듯, 길 위의 존재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색이 바래고 냄새가 빠지며, 결국 투명해진다. 투명해진 존재는 가장 아름답다. 빛을 통과시키고, 소리를 흘려보내며, 어떤 감정에도 상처 입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명함은 곧 무관심의 형태가 되기도 한다. 투명함은 살아 있으나 죽어 있는 것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그것이 여름 저녁에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이 흐릿한 이유다.



거리의 온도가 내려갈수록 열대어들은 점점 더 천천히 헤엄친다. 숨은 얕아지고, 눈동자는 선명해지고, 피부의 반사는 줄어든다. 그런 밤이 오기 직전, 모든 감각이 마지막으로 물결친다. 말없이 서로를 스치는 사람들의 어깨, 계단에서 넘어져 일어나는 아이, 입가에 아이스크림을 묻힌 채 웃는 얼굴, 그 얼굴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눈. 그 모든 것들이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비늘처럼 짧게 반짝이고, 곧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골목을 돌 때, 유리벽은 다시 생겨난다. 어항은 깨지지 않는다. 수면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열대어는 다시 방향을 튼다. 끝나지 않는 순환의 도심에서.



저녁이 되자, 거리는 어항이 되고, 사람들은 그 안을 떠다니는 열대어가 된다. 맥박은 희미하고, 숨결은 짧으며, 삶은 유리벽을 통해 구경당한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도 물 밖으로 뛰어오르려 하지 않는다. 투명한 벽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저마다의 눈부심으로 조용히 물속을 지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였다. 유리벽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이 들었을 때, 모든 것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어항은 처음부터 감금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 안에 존재했던 것은 단지 오해였고, 상상된 투명함이었으며, 타인의 시선을 상정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미약한 허영이었다. 벽은 스스로 그어놓은 경계였다. 바깥은 없었고, 안쪽 또한 없었다.


사람들은 물속을 헤엄치는 게 아니라, 의미 없는 반복을 유영하는 중이었다. 마치 기억 속의 사랑을 수백 번 되감아보는 연인처럼, 감정은 한 곳에 정체되어 있고 시간은 어떤 실체도 남기지 않은 채 표면만 스쳐간다. 존재한다는 감각은 언제나 한 박자 느리게 도착하고, 살아 있다는 사실은 결코 현실로 옮겨 붙지 않는다.



이 도시의 여름은 바로 그 지점에서 완성된다. 뜨겁지도 않고, 시원하지도 않은 상태. 뚜렷하지도 않고, 완전히 무색하지도 않은 상태.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의, 혹은 완전히 말라붙기 직전의 중간지대. 그 어떤 결론도 허락하지 않고, 그 어떤 진실도 끝내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인생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기억 속에서만 반짝이는 장면들이 실제보다 더 사실처럼 느껴지는 것, 누구에게도 닿지 않은 말이 가장 솔직한 문장이 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확신 없는 매 순간이 오히려 유일한 확실성으로 남는 것.



열대어는 유리벽을 모르고, 물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수면을 지난다. 시선은 교차하지 않고, 손길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부재가 오히려 삶을 지탱한다. 충만함이 아닌 결핍이, 실현이 아닌 지연이, 사랑이 아닌 상상이 사람들을 유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도시는 어항이 아니라, 하나의 기억 장치이며, 감정의 잔향이 부유하는 미세한 진동의 공간이다. 매일 저녁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그런 도시의 표면을 스치며, 차가운 물기를 밀어내듯 존재를 미끄러뜨린다. 그들의 삶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그 순간은 찬란하다.



부재가 영원한 예고로 남고, 사랑은 다가오지 않음으로써만 위대해지며, 삶은 계속해서 오지 않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몸짓일 때. 그 침묵의 정적 속에서, 어쩌면 진짜 생은.



비로소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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