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유 beginning

비에 젖은 종이의 마음으로

by 적적


고통을 말하지 않고 감싸는 방식에 관하여


직유법은 상처를 곧장 만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저리를 맴돌며, 감각이 닿기 직전의 경계에서 사유를 회피하는 대신 머문다. 그래서 직유는 면역을 닮았다. 감정을 직접 삼키지 않고, 비슷한 모양의 문장으로 감싸 안는 방식. 고통을 ‘칼’이라 하지 않고 ‘비에 젖은 종이’라고 부르는 순간, 마음은 그 자체로 작은 우산을 편다. 직유는 그 우산 아래 생겨나는 미세한 그림자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가시’처럼 찔렀다 말하지 않고, ‘유리컵 속 금 간 물결’이라 표현될 때, 듣는 이는 상처 대신 투명함을 떠올린다. 이 미세한 환치가 면역을 유지시킨다. 직유는 정면 돌파가 아닌 측면 회피, 그러면서도 가장 정확한 진실을 찌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6Cp6mKbRTQY&list=PLN34QNwcWHHlVmQii9dWNa3UaJJuMRN5Y&inde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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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의 곡선 안에서 감정은 여백을 얻고, 상처는 숨 쉴 틈을 얻는다. 그래서 직유는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다. 감정의 열기를 서늘하게 식히는 방식이며, 견딜 수 없는 것을 잠시나마 견디게 해주는 언어의 피부다. 그리고 그 피부가 무수한 비유로 덧대어질 때, 면역은 또 한 겹 자란다.



늦은 밤 병원 복도에 스며드는 방부제 냄새는 고요 속에서도 단호한 냄새를 지닌다. 문틈을 비집고 나온 희미한 형광등의 빛은 한 겹 투명한 방패처럼 바닥에 펼쳐지고, 그 위를 지나가는 간호사의 그림자는 흔들리는 촛불처럼 아슬아슬하다. 면역이란 단어는 그 빛을 밟을 때마다 균열을 품은 유리처럼 삐걱거린다. 질병이 몸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감염된다는 사실을 견디기 위해 발명된 은유, 그것이 면역이다.



어린 시절의 장마는 기억 속에서 항상 비슷한 냄새를 갖는다. 비에 젖은 운동화와 교실 바닥에서 풍기는 곰팡이 냄새, 부패한 물이 흘러내린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더운 김, 그리고 그 습기에 눅눅하게 눌린 머리카락 사이로 스미는 비의 촉감. 면역이란 그 장마를 견디는 기억에 가까워진다. 처음 젖었을 때는 낯설고 차갑고 무겁다. 그러나 반복되는 침수 끝에는 스며듦이 두려움보다 먼저 도착한다. 견디는 쪽이, 익숙해지는 쪽이, 결국에는 살아남는다.



면역은 상처의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가 누적되며 생기는 울퉁불퉁한 겹의 이름이다. 절망과 공포, 슬픔과 분노의 잔재가 몸 어딘가에 저장되고, 그것이 인식될 때마다 약간씩 더 두꺼워지는 조직. 어떤 이는 그것을 ‘성숙’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냉소’라 말한다. 하지만 면역은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면역은 감정을 잃는 일이 아니라, 감정이 침입했을 때 그것을 곧바로 죽이지 않고, 일정 시간 품은 뒤에 흡수하거나, 아주 천천히 내보내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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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어요. 훔치고 싶은 문장을 파는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프로필은 당신과 나 사이엔 너무 긴 설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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