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쓰인 문장, 몸으로 읽는 책

문체는 살갗을 어루만지고, 몸을 점령한다.

by 적적

동물의 혈액형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다. 소의 핏속에는 A, B, C, FV, J, L, M, N, S, Z, R′-S′, T — 12개의 이름이 흐른다. 말은 7가지, 면양은 8가지, 닭은 13가지, 돼지는 15가지로, 핏속에서 가장 많은 언어를 구사한다. 반면 원숭이는 인간처럼 4가지, 침팬지는 A형과 O형만, 고릴라는 B형만, 오랑우탄은 O형을 빼고 A, B, AB형만을 갖는다. 피의 종류는 종마다 다른 문법을 갖고, 그 문법이 바뀌면 생의 질서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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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도 그와 같다. 사람마다 문체의 혈액형은 다르고, 읽는 이는 그 문체가 자기 혈관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을 알아챈다. 그것은 시선보다 먼저, 체온이 알아차린다. 활자가 눈에 들어오기 전, 이미 손끝에서 느껴진다. 종이의 표면을 누르던 손바닥에 미묘한 끌림이 생기고, 종이의 섬유가 미세하게 떨린다. 그 떨림이 혈관을 타고 손목을 넘어가면, 온몸의 모세혈관들이 새로운 압력을 준비한다.



어떤 문장은 체내로 들어오자마자, 핏속의 질감을 바꾼다. 흐르던 붉은 액체가 갑자기 농도를 달리하며, 미묘한 끈적임을 띤다. 그것은 여름 한낮의 땀방울처럼, 피부 표면에서 증발하지 못하고 머문다. 한 문장이 전신을 돌아 폐로 도착하면, 숨을 들이마시는 깊이가 달라진다. 더 깊고, 더 천천히, 공기를 길게 핥듯 빨아들인다. 늑골 사이 근육이 팽팽해지고, 그 긴장은 척추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 골반을 감싼다.



혈액이 바뀐 몸은 새로운 반응을 만든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혀끝이 더 예민해진다. 이 변화는 단순한 흥분이 아니다. 문장이 핏속을 순환하면서, 세포 하나하나를 설득한다. 그 설득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단어들은 혀를 스치지도 않고, 목을 지나지 않고, 바로 심장으로 떨어진다. 심장은 새로운 리듬을 배운다. 규칙적인 박동 사이사이에, 불규칙한 쉼이 생기고, 그 쉼은 은밀한 기다림처럼 퍼진다.



좋은 문체는 엉기지 않는다. 부드러운 혈액처럼, 혈관벽을 따라 매끄럽게 흐르면서도, 어디선가 예리한 가장자리로 살짝 긁어 내린다. 그 상처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 대신 열을 만든다. 열은 몸 안쪽에서 은근히 부풀어 오르고, 땀구멍 근처에서 서성인다. 읽는 이는 이 열을 거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부의 순간조차 이미 늦다. 문장은 한 번 들어오면 나갈 수 없다.



그 피는 혀 밑 점막에서부터 시작해, 목을 타고, 쇄골 사이로 스며들어간다. 심장을 두드리고, 폐를 지나, 갈비뼈 안쪽에서 오래 머문다. 그 안에서 액체는 더 뜨거워지고, 숨은 더 무거워진다. 뜨거움이 척추를 타고 내려가 골반 속으로 고인다. 고인 열은 단순한 체온이 아니다. 그것은 문체가 가진 리듬, 숨의 길이, 쉼표의 위치가 만들어내는 서서히 번지는 발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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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어요. 훔치고 싶은 문장을 파는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프로필은 당신과 나 사이엔 너무 긴 설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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