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미묘케 10화

서늘함의 리허설

계절은 언제나 경계에서 가장 선명하다.

by 적적

낮에는 여전히 여름의 체온이 남아 있지만, 아침과 저녁이 오면 미묘한 균열이 생긴다. 창문을 열면 시원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한때 몸에 달라붙던 열기가 얇게 벗겨진다. 여름은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사라지고 있다. 이 계절은 소리 없이 옷자락을 정리하고, 매일 두 차례의 순간을 통해 자신이 떠나고 있음을 알린다.



사람들은 계절의 전환을 대개 무심하게 지나친다. 하지만 변화는 언제나 미세한 곳에서 먼저 시작된다. 뜨거운 아스팔트의 냄새가 서서히 줄어들고, 골목길을 지나는 바람 속에 알 수 없는 차가움이 섞인다. 공원 벤치 위에 놓인 그림자의 길이가 달라지고, 새벽녘에 들리는 매미 소리의 밀도가 옅어진다. 사라짐은 언제나 소리 없는 징후로 다가온다.



여름이 줄어드는 아침, 사람들의 옷차림도 달라진다. 반팔 셔츠 위로 가볍게 걸친 셔츠나 얇은 카디건, 그리고 저녁이 되면 억지로라도 문을 닫아야 하는 창문. 계절의 이행은 옷보다 먼저 피부가 알아차린다. 피부는 온도 변화에 가장 예민한 감각 기관이다. 이 감각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닿는다. 아침에 문을 나서는 순간, 여름이 한 겹 벗겨졌다는 사실을 피부가 먼저 기록한다.



여름은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한철의 열기가 남긴 기억은 쉽게 증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절의 이별은 애도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잃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사라짐은 이미 진행 중이다. 여름의 밤은 더 이상 축축하지 않고, 창문 너머의 어둠은 서늘하다. 이 과정은 일종의 퇴각처럼 보인다. 계절이 물러서는 방식은 언제나 점진적이다. 화려한 퇴장보다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방식으로, 여름은 작별의 리허설을 반복한다.


사람들의 삶도 계절과 닮아 있다. 어떤 관계는 여름처럼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결국 아침저녁의 공기처럼 식어간다. 사라짐은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신호로 먼저 도착한다. 대화의 속도가 느려지고,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고, 같은 공간에서조차 서로의 체온을 감지하지 못한다. 여름이 아침과 저녁에 서서히 벗겨지는 것처럼, 사랑도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사라진다. 하지만 누구도 그 순간을 정확히 가리키지 못한다. 이미 너무 늦었을 때, 사라짐은 이름을 얻는다.



여름의 흔적은 오래 남는다. 낮의 열기와 빛은 여전히 도시의 건물들 사이에 갇혀 있고, 도로 위에는 여름날의 먼지가 앉아 있다. 하지만 아침과 저녁의 서늘함이 점점 자리를 넓혀간다. 여름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중심에 머물 수 없다. 계절의 무대는 한정되어 있고, 무대 위의 시간은 철저히 분배되어 있다. 여름이 조금씩 물러날수록, 다른 계절이 자신을 준비한다. 그렇게 시간은 빈틈없이 이어진다.



아침저녁으로 여름이 사라지는 순간은, 일종의 균형처럼 느껴진다. 낮과 밤, 열기와 서늘함, 붙잡음과 놓아줌 사이의 긴장. 이 경계는 늘 짧고, 그러나 가장 선명하다. 사라짐은 경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어떤 순간은 계절의 한복판보다도 오히려 이 경계의 감각으로 남는다. 끝나가는 계절의 기척은 시작보다 더 깊게 각인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시작의 열정보다는, 사라짐의 예감이 더 오래 기억된다.



여름이 사라지는 것을 아침과 저녁이 먼저 알려주는 이유는 단순하다. 낮은 아직 여름에 속해 있지만, 하루의 끝과 시작은 이미 다른 계절의 문턱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문턱은 두 세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한쪽 발은 여름에, 다른 발은 가을에 걸쳐 있는 시간. 이 이중성 속에서 계절의 흐름을 체험한다. 동시에 스스로의 삶이 흘러가는 방식을 깨닫는다. 어떤 것은 붙잡고 싶지만 붙잡을 수 없고, 어떤 것은 놓아야만 새로운 것을 맞이할 수 있다.



아침저녁으로 여름이 사라지는 풍경은, 결국 인간의 시간 감각을 드러낸다. 한 시절이 저물어가는 순간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가진 가장 예민한 감각 중 하나다. 그러나 이 감각을 외면하면, 시간은 무심히 흘러간다. 순간을 붙잡지 못한 자에게 계절은 단순한 기상 현상일 뿐이다. 하지만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 계절은 삶의 은유가 된다.



여름이 끝나는 아침과 저녁은, 다가올 계절의 서곡이다.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도착한 미래의 조각. 이 조각들은 현실과 기억 사이의 틈을 채운다. 아침에 문을 열고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저녁에 길을 걸으며 소매를 여미는 순간, 사람들은 사라짐을 체험한다. 그것은 곧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체험이다.

아침저녁으로 여름이 사라지고 있는 계절, 그 감각은 단순한 날씨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매번 반복되는 삶의 리듬, 만남과 이별, 시작과 끝의 변주다. 그리고 이 변주는 한 인간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가 된다. 계절은 단순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짐과 도착, 애도와 희망을 동시에 담아내는 언어다.



여름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결국 시간을 바라보는 일이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다. 계절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삶이 그렇다. 아침과 저녁의 서늘함은 그 사실을 날마다 상기시킨다. 여름은 점점 줄어들지만, 그 줄어듦 속에서 새로운 계절이 태어난다. 사라짐은 끝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공간이다. 그렇게 계절은, 삶은, 계속된다.


여름은 언제나 잔혹한 방식으로 사라진다. 화려한 절정이 끝난 뒤, 그 이별은 장례식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직 여름의 열기를 붙잡으려 하지만, 계절은 도망치듯 퇴각한다. 여름의 밤은 더 이상 끈적이지 않고, 창문 너머 어둠 속에는 차가움이 기어들어온다. 그것은 연극의 막이 닫히는 순간이 아니라, 무대 뒤에서 이미 치워지고 있는 소품의 그림자와 같다. 사라짐은 그렇게 무대의 가장자리에 먼저 도착한다.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뜨겁게 달아오른 사랑조차 아침과 저녁의 공기처럼 식어간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짐은 언제나 사소한 전조로 시작된다. 대화의 간격은 길어지고, 웃음의 온도는 낮아지며,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체온이 닿지 않는다. 여름이 아침과 저녁에 의해 벗겨지는 것처럼, 사랑은 언제나 그 경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정확한 순간을 누구도 지적하지 못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사라짐은 이름을 얻는다.



여름의 흔적은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낮의 잔열은 건물의 벽면에 묻어 있고, 도로 위에는 여름날의 먼지가 무심히 흩어져 있다. 그러나 흔적은 흔적일 뿐, 중심이 될 수는 없다. 아침과 저녁의 서늘함은 점점 더 많은 영역을 점령한다. 무대 위에서 여름이 한 발짝씩 물러날수록,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가을이 점점 더 자신을 세운다. 시간의 무대는 단 한순간도 공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라짐은 경계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아침저녁의 서늘함 속에는 낮과 밤, 붙잡음과 놓아줌, 열기와 냉기 사이의 긴장이 응축되어 있다. 이 짧은 순간은 어떤 계절의 한복판보다도 오히려 더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끝나가는 기척은 시작보다 오래 남는다. 사랑 또한 그러하다. 시작의 열정보다는 이별의 예감이 훨씬 깊게 각인된다. 여름이 남긴 불타는 기억보다, 여름이 떠나던 아침과 저녁의 서늘함이 더 오래 따라다닌다.

그러나 시선을 고정하고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 계절은 삶의 가장 정직한 비유로 다가온다.



끝나가는 여름의 아침과 저녁은, 다가올 계절의 서곡이다. 이미 도착한 미래의 조각들이 현실과 기억 사이의 빈틈을 채운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공기 속에서, 저녁길을 걸으며 여미는 소매 속에서, 인간은 사라짐을 체험한다.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 도래의 첫 신호다. 여름의 사라짐은 끝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절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게 공간을 비워낸다.



사라짐은 공허가 아니라 다음을 위한 여백이다. 여름의 줄어듦 속에서 계절은 새롭게 태어난다. 그렇게 계절은, 사랑은, 삶은 계속된다. 그것이 아침저녁의 공기가.



매일 증명한다.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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