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미묘케 11화

땀의 문법

피부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

by 적적

어제와는 달리 산책길은 눅눅한 물기로 포화되어 있었다. 흙길 위로 올라오는 냄새는 눅진했고, 나무 잎사귀들은 저마다 무거운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공기 속의 습기는 피부에 와닿아, 단순히 닿는 것이 아니라 기어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습기가 아니라, 마치 온몸을 천천히 잠식해 들어오는 낯선 기운처럼 느껴졌다. 살갗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착각, 혹은 녹아내린 살갗 사이로 기억하지 못한 또 다른 몸의 체취가 스며드는 듯한 착각.



걷는다는 행위는 그저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내미는 단순한 리듬이지만, 어떤 날의 걷기는 이유 없이 더 복잡해진다. 무거워진 공기 속에서는 발자국 하나하나가 증발하지 못한 물방울처럼 잔상을 남겼다. 이 길 위에서는 땀이 단순히 체온을 낮추는 기능적 분비물이 아니라, 피부와 피부가 마주칠 수 있는 가능성의 전조가 된다. 흐르는 땀은 불편이 아니라 예감이 된다. 아직 닿지 않은 타인의 이마에서, 아직 스치지 않은 등줄기에서, 땀방울은 이미 흘러내리고 있었다.



땀은 솔직하다. 거짓말을 모른다. 얼굴은 언제든 표정을 바꿀 수 있지만 땀은 상황에 따라 흐르는 방식이 정해진다. 도망칠 수 없고, 숨길 수 없고, 꾸밀 수도 없다. 이 정직한 액체는 한 사람의 내부를 밖으로 밀어낸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노출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서로의 체온이 이미 대화를 시작해 버린 상황. 산책길 위에 스민 물기는 결국 그런 대화의 리허설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순간, 두 사람의 땀이 합쳐져 하나의 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고하는.


더위는 늘 누군가를 옆에 두고 싶은 계절을 만든다. 뜨겁고 축축한 공기는 몸을 밀착시킨다. 땀 냄새와 향수, 세제와 먼지의 냄새가 섞여 새로운 향이 된다. 산책길의 무더움 속에서 사람은 결국 서로의 체취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사랑의 기억이 아니라, 존재가 존재를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가장 원초적인 흔적이다. 살갗과 살갗이 만날 때 흘러나오는 것은 언어가 아닌 액체, 문장이 아닌 증발이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관계의 가장 첫 번째 문법이다.



물기가 차오른 길에서는 아무리 발걸음을 떼어도 벗어날 수 없는 습도의 장막이 따라온다. 숨을 쉬어도 폐 속이 채워지지 않는 기분, 삼켜도 삼켜지지 않는 공기. 그러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어떤 몸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땀을 닦아내는 손동작조차 누군가의 몸을 더듬는 제스처와 닮아 있다. 더럽고 불편하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본능적인 친밀함이 거기 숨어 있다.



사람의 기억은 종종 냄새와 습기에 달라붙는다. 어떤 여름의 오후는 땀방울 하나로 통째로 소환된다. 햇볕보다 강력한 기억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그 물방울의 길이다. 피부 위에서 맺혀 흘러내리는 액체가 하나의 연필처럼 선을 긋는다. 그 선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건 물방울이지, 물방울이 지나간 궤적은 오랫동안 남는다. 여름날의 산책길은 결국 그런 궤적을 남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워지는 동시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 그것이야말로 땀의 아이러니.



땀은 사실상 사랑의 가장 원초적인 비유다. 열이 오르지 않으면 흐르지 않고, 가까이 붙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적당한 거리에서는 결코 생기지 않는 액체. 땀방울이 피부 위에서 반짝일 때, 그것은 단순한 생리 현상이 아니라 친밀함의 증거다. 서로의 체온이 미묘하게 뒤엉키는 순간, 땀은 언어보다 솔직하게 마음의 거리를 드러낸다. 산책길 위에서 흘린 땀이든, 밤의 밀폐된 방 안에서 흘린 땀이든, 결국 그것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몸이 만들어낸 문장, 입술보다 먼저 말해버린 고백.


비밀은 언제나 피부에서 시작된다. 피부가 반응하는 순간,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한 채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린다. 사랑의 첫 장면은 대체로 눈빛이나 대화가 아니라, 미묘한 체온의 전달에서 비롯된다. 손끝에 스친 땀방울 하나, 옷깃에 스며든 냄새 한 줄기, 거기서 이미 모든 서사는 예고된다. 산책길의 눅눅함은 바로 그 예고편 같은 것이다. 아직 닿지 않은 몸이지만, 이미 함께 흘리고 있는 듯한 착각을 만들어낸다.



물기는 늘 경계를 허문다. 마른 표면은 단단하고 경계가 뚜렷하지만, 젖은 표면은 모든 것을 번지게 만든다. 땀 또한 마찬가지다. 경계는 모호해지고, 몸과 몸은 서로 섞인다. 그것이 혐오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가장 강렬한 친밀감의 증거가 된다. 사랑은 언제나 경계를 지우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산책길 위에 차오른 물기는 결국 그런 사랑의 리허설이다. 각자의 피부가 더 이상 각자일 수 없음을, 언젠가 반드시 섞이고 말 것을, 묵묵히 알려주는.



이 길을 걷다 보면 한 가지 확신이 생긴다. 더위와 습기는 결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몸과 몸이 만날 때 반드시 흘러야 하는 액체의 예고이자, 어쩔 수 없는 항복의 징후다. 아무리 거부해도 땀은 흘러내린다. 사랑 또한 그렇다. 막아낼 수 없고, 피할 수 없으며, 결국은 피부 위에서 증명된다. 증발하지 못한 습기가 산책길 위에 가득 차오르는 순간, 그 사실은 더 명확해진다. 피하지 못할 친밀함, 결국 스며들고 마는 관계, 그 모든 것은 땀방울 하나에 이미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어쩌면 땀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지는 공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허는 단순한 빈자리가 아니다. 이미 흘러내린 물방울이 사라진 자리에는 흔적처럼 남은 소금기가 빛난다. 햇빛에 반사되어 보이지 않는 무늬를 그려내듯, 사랑 또한 지나간 자리마다 은밀한 결정을 남긴다. 피부 위에서 사라진 물방울은 공기 중으로 흩어졌지만, 그 자취는 여전히 남아 표면을 건조하게 만들고, 미세한 갈라짐을 새긴다.



끝났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증발한 자리에 더 짙은 흔적을 남긴다. 여름날 산책길의 눅눅함은 결국 그렇게 기억의 방식과 닮아 있다. 불편함으로 시작해 친밀함을 만들고, 친밀함이 지나간 뒤에는 텅 빈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선명한 흔적을 남겨둔다. 이 길을 다시 걸을 때마다, 사라진 땀방울이 남긴 무늬가 되살아나고.


그 무늬 속에서 또 다른 여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진 출처> pinterest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0화서늘함의 리허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