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항해.
그대가 돛줄을 놓지 않는다면.
https://www.youtube.com/watch?v=aKC2DFsd3Xo&list=PLppVAByvRddUENQPuuFFhhGtTA12ienLJ&index=10
언어는 바다다. 그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는 것은 문장이고, 그 문장을 끌고 가는 바람이 은유다. 바람이 멎는 순간 돛은 무력하게 처진다. 어떤 배도 정박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에 갇힌다. 아무리 정교하게 조립된 문장이라 해도 은유의 바람을 만나지 못하면, 그것은 단순한 기계음처럼 건조하게 들릴 뿐이다. 은유가 불어넣는 바람이 있어야 언어는 항해가 되고, 항해가 있어야 인간은 세계를 새롭게 바라본다.
은유의 순간은 언제나 전복적이다. 언어가 일시적으로 스스로의 뿌리를 배반하는 행위. 눈앞의 사물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타자를 강제로 끌어와 겹쳐놓는다. 책상은 나무로 만든 직사각형의 물체가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사랑의 무덤일 수 있고, 굳은살 박힌 고독의 형상일 수도 있다. 은유는 사물의 본질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현실의 고정된 질서가 흔들리는 순간, 사고의 균열이 발생한다. 그 균열 속에서 새로운 빛이 들어온다.
은유는 닮은 것을 닮았다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닮지 않은 것들을 무리하게 접속시킨다. 불과 젊음, 바람과 욕망, 모래와 시간.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강제로 결합될 때, 불꽃이 튀고 그 불꽃이 언어의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지만 직관으로는 곧장 이해되는 세계. 은유는 바로 그 낯설고도 명확한 세계를 열어 보인다.
현실은 늘 명명된 세계다. 사물에는 이름이 있고, 감정에는 진단명이 붙는다. 언어는 분류하고, 분류 속에서 안정이 보장된다. 그러나 안정은 오래 지속되면 사막으로 변한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모든 것이 이미 한 번 본 풍경일 때, 세계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은유는 그 사막에 돌연 솟아오르는 오아시스다. 물을 제공할 뿐 아니라, ‘물’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묻는다. 이때 물은 단지 갈증을 해소하는 액체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징후, 혹은 망각 속에 묻힌 기억의 환영이 된다.
시인은 이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자들이다. 시는 논리로 설명하지 못하는 세계를 은유로 개방한다. “시간은 녹슨 칼날”이라는 문장은 사전적 의미로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 문장이 말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시간은 인간을 서서히 베어내고, 눈에 보이지 않게 상처를 남긴다. 시인은 은유의 돛줄을 쥐고 바람을 불러온다. 그 바람이 불어올 때, 언어는 기능을 넘어 예술이 되고, 현실은 단단한 표면을 잃고 흐려진다. 흐려짐 속에서 인간은 새로운 선명함을 본다.
철학 또한 은유를 피해갈 수 없다. 개념은 언제나 은유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의 동굴, 니체의 망치, 하이데거의 숲길. 그것들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이미지다. 인간은 이미지 없이는 사유할 수 없다. 개념의 가장 깊은 층위에는 언제나 은유가 깔려 있다. 은유가 사라진 철학은 기호의 집합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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