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수배된 계절이 돌아왔다.
가을은 언제부터인가 도피자의 신분을 부여받았다. 한때는 계절의 한 축으로서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당당히 세상을 점유하던 존재였다. 그러나 여름이 끝나지 않은 채 늘어지고, 겨울이 불쑥 앞당겨 오는 시대에 가을은 도망자의 처지에 내몰렸다. 눈앞에서 분명히 지나가고 있음에도 공식 기록에서는 자취가 흐릿해졌다. 전단에 실린 흐린 사진 속 범인처럼, 누구나 얼굴은 기억하지만 실체는 확신하지 못하는 존재. 사람들은 여전히 “가을이 왔다”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늘 허공에 붕 떠 있었다.
가을이 지명수배되었다는 소식은 정확한 출처가 없다. 어느 해였는지, 어떤 기상학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 오래된 신문 사설의 한 문장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매년 짧아지고 불안정해지는 계절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공통된 체감이 결국 ‘수배’라는 언어로 응결된 듯하다. 가을은 더 이상 당당히 이름을 부르며 기다릴 수 있는 계절이 아니었다. 도망치듯 잠시 나타나고, 이내 사라졌다.
하지만 도피자는 결국 자수를 선택했다. 올해 가을은 예상보다 늦게, 예상보다 갑작스럽게, 예상보다 고요하게 문을 두드렸다. 자신이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듯, 자수의 방식으로 돌아왔다. 자수는 항복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재확인이다. 더는 도망치지 않고, 숨어 있던 흔적을 스스로 드러내는 행위. 가을은 오래 숨어 있었던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그러나 결연하게 나타났다.
자수를 택한 가을은 화려한 장식이나 극적인 제스처를 동반하지 않았다. 법정에 선 범인처럼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도시의 길가에 낙엽을 떨어뜨리고, 바람의 각도를 조금 틀었다. 뜨겁던 태양의 열기를 서서히 거두고, 아침과 저녁의 공기에 묘한 간극을 심었다. 사람들이 무심코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커피숍 테라스의 빈자리가 하나둘 채워지고, 가벼운 겉옷이 옷걸이에 걸리며, 누군가는 창문을 조금 열어두었고 또 다른 이는 시곗바늘을 보며 하루가 짧아졌음을 감지했다. 그것이 바로 가을의 자수였다.
도피자의 시간을 거쳐온 가을이 자수함으로써 드러난 것은 역설적으로 계절의 무력함이었다. 스스로 의지를 갖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의 체감과 관습, 자연의 미세한 균형에 의해 불려 오는 존재. 사람들은 “올해는 가을이 없었다”라고 말하다가도 어느 순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이제 가을이구나”라고 중얼거린다. 가을이 자수했다는 말은 곧 인간의 언어가 계절을 붙잡고자 하는 마지막 시도이기도 했다.
가을은 왜 도망쳤을까. 기후 변화라는 명백한 원인을 들이대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기억의 불확실성’ 일 것이다. 계절은 체험되는 동시에 잊히는 존재다. 봄의 꽃들은 여름이 오면 금세 배경으로 밀려나고, 겨울의 눈발은 여름의 폭염 속에서 흐릿해진다. 가을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만 가을은 잊히는 속도가 더 빠르다. 추석이 지나면 이미 겨울옷이 매장 전면에 진열되고, 대형 마트는 김장을 위한 재료를 광고한다. 사람들의 생활은 가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애써 기다렸던 계절이지만, 오자마자 버려지는 계절. 결국 그 불필요함이 가을을 도피자로 만들었다.
가을의 자수는 인간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가을을 느낀다는 것은 온도계의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햇빛의 각도, 그림자의 길이,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 과일의 당도 같은 요소들이 동시에 작동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관적이고 파편적이다. 누구에게는 아직 여름이고, 누구에게는 이미 겨울이다. 그 사이에서만 ‘가을’이 잠시 존재한다. 그렇다면 가을의 자수란 결국 “나는 있었다”라는 증언일지 모른다. 존재를 의심받는 존재가 남길 수 있는 최후의 기록이다.
길가에 떨어진 낙엽은 마치 증거물처럼 보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 흔적은 사건 현장의 테이프처럼 계절의 경계를 표시한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가을의 지문 같았고, 대추와 밤은 알리바이처럼 기능했다. 그 모든 증거가 모여 가을의 자수를 입증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그 증거를 치워버린다. 낙엽은 쓸려나가고, 대추는 식탁에서 사라진다. 남는 것은 기억의 파편뿐이다.
자수가 모든 오해를 풀지는 못한다. 자수는 존재를 드러내지만, 그 드러남은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다. 사람들은 자수한 가을을 기록하되 기록의 방식은 조급하고 산만하다. 사진 몇 장, SNS의 캡션 몇 줄, 시장 통의 냄새를 기억하는 몇몇 이의 말들. 이런 기록들은 날것의 체감을 전달하지 못한다. 가을의 섬세한 온도 변화,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의 결, 창문에 맺힌 이슬의 모양 같은 것들은 글자로 옮기기 어려운 체취를 지닌다. 그래서 자수의 기록은 언제나 단편적이다.
가을의 자수는 일상의 리듬을 바꾼다. 출퇴근 길의 풍경이 달라지고, 책갈피의 자리가 달라진다. 손에 쥔 음료가 더 뜨거워도 금방 식을 것이라는 예감이 생긴다. 장바구니에는 김장 재료와 더불어 군밤 봉지가 섞인다. 사람들이 서점에 오래 머물고, 창가의 카페 의자는 낮 시간에는 햇빛을 받기 위해 비워진다. 그런 디테일들이 모여 공동체의 체감 온도를 바꾼다. 가을의 자수는 거대한 정치나 경제의 변동이 아니라, 바로 이런 사소한 일상들의 재배열에 의해 느껴진다.
그리고 가을은 자수로서 스스로를 재정의한다. 도망자가 스스로 증언을 선택했을 때, 도망의 이유와 자수의 방식은 동시에 드러난다. 가을이 도망친 이유는 단순한 기후의 변동을 넘어 문명의 속도와 기억의 빈곤에 닿아 있다. 자수는 그 도망을 인정하되, 사라진 존재가 여전히 세계의 일부였음을 확인한다. 형량을 선고받듯 곧 다시 사라질 운명임을 알면서도, 자수는 계절의 권리를 주장하는 마지막 제스처다.
도시는 가을의 자수를 통해 잠시 균형을 회복했다. 지나치게 길었던 여름과 성급히 다가올 겨울 사이에서 작은 숨을 고르기 위한 틈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 틈에서 차를 마시고, 책장을 넘기고, 걸음을 더디게 한다. 그러나 그 틈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모두 알고 있다. 자수한 가을은 곧 판결을 받듯, 다시 사라질 운명을 짊어진다. 이 사실은 낭만적이라기보다 현실적이다. 기억은 가혹하고, 시간은 무심하다.
가을은 결국 인간의 무력한 희망을 드러낸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시도, 사라질 것을 기록하려는 몸부림. 가을이 자수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아마 더 절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을은 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존재를 인정받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가을은 이제 도망자가 아니라, 스스로 증언한 생존자가 되었다. 증언은 판결을 기다리지 않으며, 때로는 판결보다 강한 힘을 발휘한다. 사람들은 증언을 통해 계절을 다시 불러내고, 그 불러냄을 통해 잠깐의 안도를 얻는다. 가을의 자수는 바로 그 안도의 근거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손은 늘 미약하지만, 그래도 손을 뻗는다. 그리고 그 손길이 맞닿는 순간, 계절은 비로소 다시 이름을 얻는다.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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