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삼킨 활자.beginning

언어는 어떻게 색이 되고

by 적적

감각은 어떻게 갇히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aKC2DFsd3Xo&list=PLppVAByvRddUENQPuuFFhhGtTA12ienLJ&index=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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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낡은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지만, 먼지와 빛이 섞여 뿌옇게 흩어졌다. 책장은 군데군데 긁힌 자국과 오래된 손때로 얼룩져 있었고, 종이 냄새는 가라앉지 않은 물살처럼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꺼낸 책의 한 문장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그 문장은 붉었다. 눈으로 본 색이 아니라, 읽자마자 온몸에 퍼지는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귀 뒤편에 뜨겁게 입김을 불어넣는 듯한 열기. 문장은 짧았고, 설명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단어들의 배열이 어딘가 불안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활자 위에 잉크가 아니라 피가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동안 숨을 들이쉬지 못했다. 빛은 그대로 창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 순간 책의 페이지는 붉은 방이 되었다. 그 방 안에서 그는 문장과 단둘이 갇혀 있었다.



붉은 문장은 사랑을 말하는 듯했으나, 동시에 분노와 욕망의 그림자를 덮고 있었다. 남자는 그 문장을 읽는 동안 심장이 불필요하게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 방금 전 그의 손목을 움켜쥔 듯, 맥박은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창밖의 나무는 여전히 초록이었지만, 눈에는 모든 것이 희미하게 붉은 기운을 띠고 보였다. 문장은 세상의 색을 바꿔놓았다.



책장을 넘기자 이번에는 파란 문장이 나타났다. 붉음 뒤에 이어진 푸름은 더 선명했다. 그것은 깊은 심해를 닮아 있었다. 단어들은 느릿하게 가라앉았고, 문장 사이사이에는 공기방울 대신 침묵이 떠올랐다. 그는 눈앞에 있는 활자를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먼바다 밑바닥에 홀로 서 있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조차, 그 순간에는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파란 문장은 빛을 막았다. 막는 대신, 다른 종류의 어둠을 만들었다.



그는 책을 덮었다. 책장을 지나칠 때마다 새로운 색의 문장들이 불쑥 나타났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그를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초록의 문장은 질투와 숲 냄새를 섞어내며 코끝을 찔렀고, 검은 문장은 무덤 같은 침묵을 펼쳐놓았다. 한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그는 또 다른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어떤 방에는 창이 있었지만, 커튼이 두껍게 드리워져 있었다. 또 어떤 방은 문조차 닫혀 있어 빛이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점점 알게 되었다. 문장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빛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색이 없는 문장은 쉽게 잊혔다. 금방 지나가 버렸고, 아무런 감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색을 지닌 문장은 오래 남았다. 그 잔상은 눈꺼풀 안쪽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붉은 문장을 읽은 뒤에는 세상의 모든 흰 것이 분홍빛으로 보였고, 푸른 문장을 읽은 뒤에는 가로등 불빛조차 차갑게 느껴졌다.



문장은 빛을 차단하는 동시에, 새로운 빛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현실의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을 왜곡하는 색의 빛이었다. 그는 그것을 진실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진실이 아니라고 해서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실보다 오래 남는 것은 그 색의 잔상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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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어요. 훔치고 싶은 문장을 파는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프로필은 당신과 나 사이엔 너무 긴 설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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