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빛의 문장

형용사가 덧칠하는 세계의 숨결

by 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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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도 그림처럼 바랜다. 오래된 문장은 처음의 광택을 잃고, 감정의 바니쉬가 증발한 자리에 건조한 의미만 남는다. 그러나 그 마른 표면 아래에는 여전히 젖은 시간이 있다. 읽는다는 행위는 그 표면을 조심스레 긁어내는 일이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문장은 다시 빛을 머금는다. 형용사는 그때 스며드는 미세한 온도다. 단어의 결을 따라 손끝이 움직이고, 그 속에서 잊혔던 숨결이 되살아난다.


형용사는 꾸밈이 아니라 회복이다. 언어의 표면에서 사라진 감정을 되찾는 느린 복원 작업이다. 오래된 문장을 읽을 때 마음이 젖는 것은, 그 문장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화가는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 앉았다. 창문은 동쪽을 향해 있었고, 햇빛은 늘 일정한 각도로 캔버스를 비췄다. 그는 늘 그 빛을 기다렸다. 붓을 들기 전,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세계의 색은 미세하게 달라졌다. 그가 믿은 것은 그 변화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 사물의 표면에서 스며 나오는 미묘한 진동 같은 것.


그는 매일 그림을 덧칠했다. 처음엔 나무를 그렸고, 그 위에 공기를 얹었고, 그 공기 위에 빛을 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어쩌면 완성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이 매일 하는 일이 ‘덧칠’이 아니라, 오히려 ‘제거’에 가깝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물감을 얹는 행위는 겉보기엔 더해가는 과정이지만, 실제로는 표면 아래를 더 분명히 보기 위한 과정이었다.



어느 날 그는 오래된 그림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한때 자신이 가장 아꼈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그 위에 발라둔 바니쉬가 어두워져, 그림은 거의 갈색에 가까운 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칼날을 가볍게 세워 그 표면을 긁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때 아래에서 전혀 다른 색이 드러났다. 눈부실 만큼 선명한 푸른색이었다.


바니쉬는 유화의 마지막 숨이다. 완성된 그림이 건조된 뒤, 화가는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본다. 색이 안정되었는지, 붓질의 흔적이 굳어버리진 않았는지, 빛이 캔버스 위에서 고르게 머무는지를 확인한다. 그 모든 절차가 끝난 뒤, 바니쉬의 시간이 찾아온다. 작은 유리병 속의 바니쉬는 투명하지만, 그 안에는 세월의 냄새가 스며 있다.



송진이 섞여 만든 액체는 묘하게 끈적이며, 빛을 받으면 아주 옅은 황색을 띤다. 화가는 넓고 부드러운 붓을 들어 그것을 천천히 적신다. 바니쉬는 물감 위에 덧입혀지는 얇은 막이 아니라, 일종의 숨결이다. 그 붓질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색은 잠시 젖은 듯 깊어진다. 붉은색은 포도주처럼 짙어지고, 푸른색은 바다의 표면처럼 빛을 머금는다. 바니쉬는 단지 보호막이 아니다. 그것은 색의 균형을 되살리고, 그림 전체에 하나의 온도를 부여한다. 오랜 시간 마른 물감들이 서로 다른 광택을 내기 시작할 때, 바니쉬는 그 차이를 덮어 조화를 만든다.

표면의 거칠음은 사라지고, 매끈한 막 아래에서 색들은 다시 하나의 호흡을 시작한다. 그러나 바니쉬는 동시에 시간의 유리관이기도 하다. 발라지는 순간부터 그림은 봉인된다. 먼지와 공기, 습도와 냄새, 모든 외부로부터 분리된 채 자신만의 시간 속에 갇힌다. 세월이 지나면 그 투명한 막은 서서히 황변 하며, 그림은 그 위로 다시 어두워진다. 그래서 어떤 화가들은 바니쉬를 두려워한다.



완성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회복할 수 없는 단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니쉬는 그림을 보호하지만, 또한 고립시킨다. 그것은 유화의 마지막 의식이자, 색과 빛의 관계를 영원히 봉인하는 약속이다.

문장은 캔버스와 닮았다. 명사는 형태를 그리고, 동사는 움직임을 만든다. 그러나 그 위에 얇게 덧입혀진 형용사는, 세계의 ‘살결’을 만든다. 화가는 물감으로 그것을 다루지만, 언어의 화가는 단어로 그것을 다룬다. 형용사는 사물의 색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빛이 어떻게 닿는지를 달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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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어요. 훔치고 싶은 문장을 파는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프로필은 당신과 나 사이엔 너무 긴 설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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