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인칭들의 도시
이름 없이 서로를 부르는 방식.
첫눈이 내리던 날, 도시의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고층 빌딩 사이로 흩날리는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졌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눈은 방향을 잃고 허공에 머물렀다. 회색 콘크리트 벽에 부딪힌 눈송이는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습기 어린 냄새가 섞인 겨울의 냄새, 차가운 철제 손잡이에 닿을 때의 미세한 냉기. 그 속에서 사람들은 이름을 잃어버린 존재처럼 걸어갔다.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도, 그에 대한 대답도 희미했다. 발자국이 남지 않는 숲 속의 설인처럼, 대명사는 존재의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한 카페 창가 자리, 김이 가득한 유리창에 손바닥 자국이 번져 있다. 누군가 커피를 마시며 오래 머물렀던 흔적. 테이블 위엔 식지 않은 잔 하나, 그 옆에는 반쯤 읽힌 책이 엎드려 있다. 조명이 책장 위를 부드럽게 비춘다. 커피 향은 깊고 묵직하며, 바닥에 떨어진 설탕 알갱이가 미세하게 반짝인다. 창밖의 거리에는 눈이 계속 내리고, 사람들은 검은 우산을 쓴 채 조용히 스쳐 지나간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외투의 색, 구두의 소리, 어깨의 움직임만이 존재를 암시한다.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 대명사가 남는다. 그는, 그녀는, 그것은. 언어의 껍질 안에서만 존재가 유지된다.
눈이 도시의 소음을 삼킨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신호등이 바뀔 때의 전자음도, 모두 눈 밑으로 묻힌다. 인도의 가로수 가지마다 눈이 쌓이고, 가지 끝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미세하게 휘어진다. 길모퉁이 작은 구멍가게의 문 위에는 종이 하나 걸려 있다. ‘잠시 다녀옵니다.’ 손글씨는 삐뚤 하고, 잉크가 번져 있다. 그 문을 닫은 사람의 이름은 없다. 그저 ‘누군가’라는 대명사만이 존재를 대신한다. 언어는 언제나 구체를 희생시켜 보편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삶의 결이 가벼워진다.
지하철역 계단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 내려간다. 몸 냄새와 향수, 젖은 옷의 섞임. 스크린도어 유리에 비친 얼굴들은 서로의 형태를 잠식한다. 전동차가 들어올 때의 진동, 금속의 마찰음이 발밑을 울린다. 그 속에서 ‘그’, ‘그녀’, ‘그들’은 존재한다. 이름은 부재한다. 대명사는 정체를 보호하고, 동시에 존재를 흐리게 만든다. 사람들은 서로를 지칭하지만, 그 지칭은 정확히 누구인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의 관계란 그 불분명함 위에서만 유지되는지도 모른다. 정확한 이름이 불려지는 순간, 관계는 투명해지고, 투명함은 곧 파열을 불러온다.
밤이 오면 대명사는 더욱 힘을 얻는다. 거리의 불빛 아래, 사람들은 그림자만 남긴다. 가로등 불빛은 노랗고, 눈 위의 반사광은 은빛이다. 그 사이를 누비는 존재들은 모두 ‘그’다. 손에 쥔 휴대폰의 빛이 얼굴을 희미하게 비춘다. 화면 속 이름은 사라지고, 아이콘만이 남는다. 메시지의 문장 속에는 ‘너’가, ‘그’가, ‘그녀’가 존재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말은 서로를 닮아가지만, 닮는다는 것은 곧 사라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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