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이 나타난 자리

읽힌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들

by 적적


문장은 길 위에 놓인 돌멩이처럼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존재한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낮은 위치에서, 그러나 발걸음의 각도와 속도를 은밀히 계산하며 기다린다.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 세계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방처럼 어수선하다. 생각은 서랍 밖으로 흘러나와 있고 감정은 라벨이 붙지 않은 채 굴러다닌다. 그러다 어느 순간, 특정한 문장이 나타나 방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그 문장은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배치를 바꾼다.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그동안 눈에 띄지 않던 사소한 물건들을 갑자기 또렷하게 만든다.

서점에서의 만남은 종종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의도는 언제나 빗나간다. 특정 작가의 신작을 찾으러 들어갔다가, 전혀 다른 코너에서 얇은 문고본 하나가 손에 잡힌다. 종이는 오래된 먼지 냄새를 품고 있고, 활자는 약간 기울어져 있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몸의 균형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마치 발밑의 보도가 예상보다 한 뼘 낮았던 것처럼. 그 흔들림은 불쾌함이 아니라 경고에 가깝다. 이 문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시간을 건너온 문장은. 과거의 어떤 오후, 지하철 안에서 흘려보낸 시선, 설명할 수 없던 불안의 잔여물,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문장 속에서 다시 정렬된다. 문장은 기억을 발명하지 않는다. 대신 기억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그래서 문장을 읽는 일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행위라기보다, 오래된 서류철을 다시 여는 일에 가깝다. 그 안에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정리되지 않았던 삶의 조각들이 있다.



모든 문장이 그런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문장은 기능을 다하면 사라진다. 안내문처럼, 설명서처럼. 그러나 만나야 할 문장은 다르다. 그 문장은 독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척하면서도, 정확히 한 사람의 내부 구조를 겨냥한다. 읽히는 순간, 문장은 독자보다 먼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문장이 독자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독자가 문장을 향해 천천히 걸어온 것처럼.



이런 만남은 종종 삶의 가장 평범한 순간에 발생한다. 퇴근 후 불이 반쯤 꺼진 방, 물이 식어가는 컵, 창밖에서 들리는 애매한 소음들 사이에서 문장은 갑자기 말을 건다. 그 말은 크지 않다. 거의 속삭임에 가깝다. 하지만 그 미묘한 음량 때문에 오히려 정확하게 들린다. 문장은 주장하지 않고,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의 형태로 남는다. 그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문장을 만난 이후의 세계는 이전과 완전히 같지 않다. 변화는 급격하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물의 순서가 달라진다.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한 칸 뒤로 밀리고, 별것 아니라고 여겼던 장면들이 전면으로 나온다. 문장은 삶을 해석하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한다. 그 렌즈는 세계를 왜곡하지 않는다. 다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균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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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어요. 훔치고 싶은 문장을 파는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프로필은 당신과 나 사이엔 너무 긴 설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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