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패티쉬가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를 찾자면.

by 적적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아직 깨지지 않은 어둠을 손끝으로 더듬어요.

모란의 발바닥이 바닥에 닿아 살며시 녹아내리며 마지막으로 떨어질 때, 분홍빛 달콤하고 따스하며 탄력 있는 분홍이 낮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소릴 들어요.


꼬리를 흔들면 날아오르는 이제 머물렀던 자리를 떠나는 잔 털들의 이륙하는 순간과 바닥에 착륙하는 순간을 눈꺼풀 안으로 파고드는 걸 상상해 보아요.

금요일 새벽은 아마도 세상에 없는 시간처럼 느껴져요.

가을치곤 바람이 다른 가을과 달라졌어요 턱없이 맑은 햇살이 비추는 아침이기도 하구요.


가끔은 말이죠…. 그 사내는 슬리퍼를 신은 발이 부러울 때가 있어요. 사고 이후 슬리퍼를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수십 년 전 마지막으로 수영을 해본 일이나,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던 후로 물에 들어가거나 자전거 위를 오른다면 다시 물살을 가르는 일이 균형을 잡고 바람 속을 휘젓는 일이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죠.


슬리퍼를 신는 일을 여름이면 더 골똘히 생각해 보곤 하죠 아니, 봄, 가을 겨울 그리고 여름 동안은 더 깊이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모를 거예요. 슬리퍼를 신기 위해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살짝 힘이 주어지며 발가락을 살며시 오므려야 한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일이 너무나 대단하고 유려한 일이었다는 걸.

카페테라스에 앉아 슬리퍼를 살짝 발가락 사이에 끼우고 발뒤꿈치가 자유를 얻어 허공에 나부끼며 까닥거리는 슬리퍼가 새의 날갯짓처럼 천천히 상승기류를 찾아 날아오르는 그 보잘것없는 순간을 부러움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는 한 남자의 집요한 눈길을 말이죠.


그런 기적은 여름이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일이어서 아무도 관심이 없어 보이죠. 꿈속에서 신어 본 슬리퍼는 엄지발가락을 살짝 끼우고 발등을 가리는 가죽 스트링이 있고 바닥 면이 얇아서 조심히 걸어야 했어요.

그 흔한 슬리퍼 하나가 집에 없어요. 아! 오래전 집에 잠시 머물렀던 그녀가 굳이 외출할 때 구두를 신는 것이 불편하다고 해서 근처 다O소에 가서 밖에서 신을 수 있는 슬리퍼를 사다가 이틀 동안 신었던 적이 있었군요. 아마도 신발장에서 다시 올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실외에서 신을 수 있는 슬리퍼를 고르는 일은 너무 더운 여름날 더위를 피해 호기심으로 찾아간 모델하우스 같은 거였어요. 기억나는 건 자꾸만 우리를 따라다니며 신혼부부 인지를 묻던 친절하지만, 목표가 뚜렷해서 립라인이 너무나 선명했던 직원의 미소와 누구나 신을 수 있는 슬리퍼가 무척 불편했던 기억과 내부 실내 장식들이 너무 깔끔해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이곳을 더럽혀야 사람 사는 곳 같을까 하는 의구심뿐이었죠.


이 우울의 발단은 그 이른 아침에 테라스에서 슬리퍼를 까닥이던 발가락, 복숭아뼈와 발뒤꿈치가 눈부시게 윤기 나던 그 여자 때문이었어요.

발과 슬리퍼와의 느슨한 관계에 있는 거죠


어쩌면 우울은 그런 거 아닐까…. 가질 수 없는 걸 부러워하는 일. 할 수도 없어서 꿈도 꾸지 않는 그 일….

느슨한 관계를 우울이라고 이름 붙여보기로.


자, 오늘 일용할 우울은 이걸로 충분할 것 같죠?


추운데 양말도 신지 않고


발은 시리지 않았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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