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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종결자 Aug 01. 2018

내 시간을 관리할 수 있는 자유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내 시간을 관리할 수 있는 권리가 제한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유독 시간에 대한 침해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오늘 이 일을 해야 한다고 계획했는데 다른 사람의 방해로 그 일이 지장을 받게 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었다. 따라서 학창 시절 반강제로 내 시간을 빼앗는 야간 자율학습이나 수련회는 늘 불만의 대상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부해야 가장 잘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은 나 자신인데 왜 학교가 이것을 모두 무시하고 밤 10시까지 학생들을 학교에 앉혀놓아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언제나 자율학습에 맞서 싸우는 건방진 학생이었다. 


직장인의 삶은 학생 때와는 달랐다. "공식적 업무 시간 외 시간은 제 것입니다."라고 소리치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 순간이 많았지만 상사와 동료들의 미움을 받으며 퇴근 시간을 사수할 용기는 없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만큼 입 다물고 열근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졸업 직후 스쳐가듯 일한 광고 회사가 있었다. 광고 업계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실제 업무는 상상을 초월했다. 2주 내내 막차가 끊기는 12시가 넘도록 일을 했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 근무 시간이 그 회사에 있는 모든 상사에게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라는 것이었다. 열정이나 프로젝트에 대한 목표 의식보다는 그렇게 일하는 게 광고업계에선 당연하니까, 다른 회사로 이직해도 마찬가지니까 별 수 없다는 태도였다. 업계에 20년이 넘게 있던 부장님은 가장 편할 때가 5시간 넘는 장거리 출장을 갈 때라고 했는데 비행기에서 방해받지 않고 쭉 잘 수 있기 때문이란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 같이 동트는 새벽까지 소주를 마시고 사우나를 가서 샤워를 한 뒤 회사로 출근했다. 이 이상한 직장 문화를 당연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버리기 전에 빨리 탈출해야 했다. 그렇다. "요즘 젊은이들은 끈기도 참을성도 없어."라는 말의 1등 공신은 확실히 내가 맞다. 온종일 방송국에 사는 유능한 피디 친구를 생각할 때면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가도 확실히 사람은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자책을 멈춘다. 

  

한국을 떠난 뒤엔 적어도 야근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그게 한국 기업의 해외 법인이든, 독일 회사든 마찬가지였다. 독일인들은 결정권이 있는 관리자는 그만큼의 책임과 보상이 따르니 더 많이 일할 수 있지만(실제로 계약서 상에도 관리자급의 추가 업무에 관한 책임이 명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실무 직원은 불필요하게 더 오랜 시간 근무를 하거나 그래야 할 만큼의 많은 업무량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기본으로 갖고 있다. 업무량이 많아 며칠 자발적 야근을 하면 이후엔 알아서 일찍 퇴근해 버린다. 야근이 지속되면 업무량 배분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므로 팀장과 면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대로 사태를 방치하면 무능력해서 일을 불필요하게 오래 하는 직원이 되거나, 자신의 권리와 요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직원이 되기 십상이다. 반드시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직업들을 제외하곤 스스로가 자신에게 주어진 주당 근무 시간을 어떻게 배분하여 일할 것인지 계획한다. 예컨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10시간 정도 힘들게 일한 뒤 금요일엔 점심을 먹자마자 사무실을 떠나버리는 독일 직원들이 무척 많다. 


한국에서 회사가 집중되어 있는 곳에 가면 출근 시간에 임박해 사무실에 전력으로 단거리 경주하는 직원들을 보곤 했다. 내가 일했던 회사도 출근 관리가 무척 엄격한 편이었다. 출근 시간 8시 30분부터 직원 건강을 위한 국민 체조 방송이 나오는데 조금이라도 지각을 하면 체조하는 직원과 상사 사이를 뚫고 지나가며 '나 늦었어요~'광고해야 하는 뻘쭘함을 감당해야 했다. 지각이 세 번 반복되면 인사고과에 반영되므로 매일 아침 8시 20분에서 30분 사이에 지하철에서 회사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직원들이 수두룩했다. 간혹 지하철 지연으로 늦을 것 같으면 역사를 뛰어나와 택시를 잡아 타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지각의 의미가 별로 없어 직원들이 단체로 회사 정문을 향해 달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다. 오히려 건물 보안 요원으로부터 사고의 위험이 있으니 뛰지 말라는 경고장을 받을 수 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나도 미팅에 늦어 뛰다가 경고를 받고 안전 교육을 이수한 적이 있다. 출근길이나 회사 안에서 생기는 사고는 회사 책임이 있어 더욱 엄격하게 관리하는 편이다. 따라서 늦는 경우 간단히 이메일이나 문자로 팀장에게 알리면 된다. 독일 기업 중에도 출퇴근 카드를 찍는 곳이 있으나 몇 시에 사무실을 왔다 갔다 했는지 감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추가 근무 시간을 보상하기 위한 목적과 보안 목적으로 주로 사용한다.  

독일 회사에서는 점심시간도 내 선택에 달려 있다. 일반적으로는 12시가 지나면 점심시간이다라는 인식이 있지만 회사에서 엄격하게 지정한 점심시간이란 것은 없다. 본인이 배가 고플 때나 시간이 있을 때 식사하면 된다. 사내 식당이 있는 대기업의 경우 식당 운영 시간이 대게 11시부터 2시까지 3시간 정도로 여유가 있다. 회사 주변에 식당이 몰려 있지도 않고 가격 부담도 있어 점심으로 외식은 거의 하지 않는다. 대게 도시락을 싸오거나 근처 마트나 카페에서 구매한 샌드위치, 샐러드를 구입하여 먹는다. 일을 빨리 끝내고 퇴근하는 것을 선호하는 탓에 1시간을 꽉 채워 점심을 먹기보다는 30분 정도로 재빨리 먹거나 일을 하면서 먹는다. 어찌 보면 궁상맞아 보이는 '컴퓨터 앞에서 빵 먹기'나 '이동하며 빵 먹기'가 독일에선 무척 흔한 풍경이다. 매일 같은 사람과 같은 시간,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다. (특히 부장님 입 맛에 맞는 메뉴를 억지로 먹는 것보담야!) 


시간에 대한 자율은 회식같은 회사 모임으로부터의 자유도 의미한다. 독일에서 회식이란 '상사 또는 회사가 비용을 부담하는 식사'를 의미한다. 팀 활동비가 따로 나오는 회사가 간혹 있지만 보편적이지 않다. 비용 부담이 회식이 많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더치페이가 자연스러운 독일에서 본인보다 어리다거나 부하 직원이라는 이유로 비싼 밥을 '쏘는'일은 전무하여 그저 맘 맞는 직원들끼리 퇴근 후 근처 바에서 맥주 한두 잔 마시고 집에 가는 것이 비공식적 회식이라면 회식이다. 독일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회식을 하는 건 일 년에 딱 한 번, 크리스마스 파티 정도이다. 이 날 만큼은 거의 모든 회사들이 하루 저녁 큰 파티를 열고 폭식과 폭음을 즐기도록 해준다. 우리나라에서 회식의 의미가 서로 간의 친목을 다지고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술의 힘을 빌려 보다 편하게 이야기하는 등 소통의 벽을 허무는 데 목적이 있다면 독일에서는 이런 것들을 근무 시간에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가족과의 시간이나 본인이 계획한 자유 시간을 희생하면서 이루어내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회식이 있을 대는 적어도 2주 전에 미리 공지해주고, 금요일이나 공휴일 전날은 피한다. 휴일은 전날 저녁까지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이렇듯 근무시간과 여가시간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은 직원을 통제, 감시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기보다 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는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로 보기 때문이다. 직원은 '가족 같은 사람'도 아니고, '회사의 소유물'도 아니다. 더불어 효율성을 항상 강조하는 독일 기업의 입장에서는 통제와 규율 안에 누군가를 관리하는 것보다는 자율에 맡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간주한다. 괜히 점심시간에 누가 늦게 들어왔는지 누가 출근을 제시간에 하지 않았는지 관리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도 없고 직원 평가도 군대식 일괄적 태도보다 업무 성과 자체에 중점을 두면 되니 관리자 입장에서도 편하다. 일도 바빠 죽겠는데 부하 직원이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점검하는 것도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결국 일이란 건, 결과물이 말해주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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