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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 Oct 22. 2022

애쓰지 않아도 별처럼 반짝이는 당신에게,

♪ From now on

우리 몸도 숨결에서도

별과 같은 원자들이 흐르고 있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살갗을 만지는 건

별의 조각을 만지는 것과 다름없대.


너는 애쓰지 않아도, 별처럼 반짝이는 사람이야.




지인은 내가 엄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엄마를 떠나보내지 않아서 아직도 눈물이 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좋은 곳’으로 보내는 의식을 치러보는 것을 권했다. 지인의 말대로, 떠나는 엄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는 아이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 의식을 치르지 않을 것이다.




‘좋은 곳’은 어디인가? 누군가는 천국으로 갔을 거라고 했다. 천국으로 갈 거라 믿는 그들은 어째서,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에 눈물이 나는가? 환호하며 파티라도 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유족들에게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는 말이 섣불리 나오지 않는다. 좋은 곳이 어디인지 정의 내리지 못했고, 그런 곳이 정말 존재하는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거참, 피곤하게 산다.’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존의 문제였다. 엄마가 어디로 간 건지, 아니면 어디로도 가지 않은 건지, 납득이 가지 않아서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모르겠는 사후세계보다는, 차라리 유족이었던 내가 다시 유족이 되는 것을 택했다. 타인의 장례식장에서 영정사진 앞에 국화를 놓을 때는, 엄마의 사망 선고가 울려 퍼지는 장면을 떠올린다. 유족들에게 인사를 건넬 때는, 그들의 눈동자에서 무너지는 마음을 붙들던 내 모습을 찾는다.




사춘기 시절,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교복이라는 허물을 아무렇게나 벗어 두었다. 엄마는 말없이 내 뒤를 따라 허물을 주워 빨래 바구니에 넣어 주었다.

그 청소년은 자라서 아기를 낳았다. 아기도 허물을 벗었다. 엄마가 된 청소년은 자신의 엄마처럼 아이의 옷을 주워 세탁실에 넣었다. 그때, 허물을 벗는 나를 보는 엄마와 아이의 허물을 정리하던 내가, 같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크리스토프 갈파르의 <우주, 시간, 그 너머>에서 아래 글을 접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구를 구성하는 무거운 원자들, 생명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원자들, 우리 몸에 들어 있는 원자들이 모두 오래전 항성의 심장부에서 만들어졌다. 우리가 숨을 쉴 때 들이마시는 것도 그런 원자들이다. 따라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살갗을 만지는 것은 곧 별의 조각을 만지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는 같고, 단지 순서나 위치가 다른 것뿐이라면 우린 어쩌면,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게 달라 보였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실 우리의 일부 거나 우리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 이후로 나의 세상은 점차 넓어졌다.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일 때 내가 춤을 추는 듯했다. 아이의 손을 잡을 때 내가 아이가 되어 엄마의 손을 잡는 듯했다. 세상이 모두 '나'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내가 엄마이고 엄마가 나인 것 같았다.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이 관점이 엄마의 부재로 외로웠던 나를 위로해줬다.


그러다가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여전히 엄마는 떠나고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이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으면 좋으련만, 이 놈은 생각보다 질척거렸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정신승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의외의 곳에서 나의 외로움은 해체되었다.




고1 물리 강의를 듣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이 건전지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었다.

'하나였던 +와 -를 떨어트려 전기를 만드는 건전지'에 대해 설명했을 때, 나의 스파크는 선생님의 강의 목표와는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누군가와 닿고 싶은 이유는, 이미 하나인 우리가 경계선을 긋고 외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와 -처럼 서로에게 흐르고 싶은 충동이 생겨서 그런 것 아닐까?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연결되어 있음을 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른 것이다.


이 생각을 레스터 레븐슨은 책 <깨달음 그리고 지혜 1>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분리감을 놓아 보내면 그 상태야말로 최고의 사랑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은 그가 접시를 깬 것이 아니라 우리가 깼다고 느낍니다. 그가 옷을 사느라 돈을 쓴 게 아니라 우리가 썼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나는 이제 믿어보려 한다.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나라고.

우리의 생김새나 생각이 달라서 가끔 까먹더라도, 다시금 이 믿음으로 돌아가겠노라 다짐해 본다.


이 모든 게 엄마를 떠나보내기 싫어서 궤변을 늘어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의 진실 여부는 모르겠다. 하지만 더 그럴싸한 이론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당분간 이 생각의 섬에 정박할 것 같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나에게 엄마가 갔다는 ‘좋은 곳’은 내가 있는 장소, 바로 이곳이다.

나의 마음의 궁전. 그는 영원히 이곳으로 흐른다.




여기까지 의식이 닿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오직,

당신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덕분이었다.

당신을 사랑해서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었다.


벅찰 만큼 영원한 기쁨이 흘러넘쳐, 당신에게 닿기를.

모든 사랑을 당신에게 내맡기며, 한계 없는 고마움을 당신에게 전한다.




ⓒ Brigitte Tohm,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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