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2021년 10월 10일 오전 8시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니 어째 출발이 불안하다.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가 잘못되었기를 바라며 배낭을 메었다.
회룡역에서 출발해 불광동 장미공원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 예상되는데 비까지 오면 생각만 해도 습습하구나.
지하철역에서 내려 집결지로 향하는 길.
큰 배낭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을 보니 멀리서 봐도 한눈에 상비군임을 알겠다.
괜히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인사를 하고 싶지만 이 놈의 무게는 언제쯤 익숙해지려나?
공원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대원들과 함께 부토라에서 협찬해준 빨간 티셔츠를 겹쳐 입었다.
빨강 옷이 곧잘 어울리는 대원들의 유쾌한 웃음 사이로 나 홀로 어색하게 생애 두 번째 빨강 옷을 입어본다.
95 사이즈가 너무 커 보였는지 안숙 씨가 본인 옷과 바꿔 입자고 제안했다.
본인도 큰 사이즈였는데 마음씀이 고마웠다.
아침부터 옷 선물도 받고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도 받아 기분 좋게 출발을 해본다.
훈련 코스로 예정된 회룡역 - 포대능선 - 신선대 - 우이암 - 우이동 - 진달래능선 - 대동문 - 문수봉 - 비봉 - 족두리봉 - 불광동 장미공원까지는 꽤나 긴 길이라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마음과는 다르게 젖어 있는 산길은 미끄러워 조심스러웠다.
가뜩이나 느린 데 갈 길이 멀구나.
흐린 하늘을 쳐다보다 조원들을 놓칠까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힘든 길이 나오면 어김없이 오늘도 파이팅을 외치는 상헌 선배님의 목소리가 산에 퍼진다.
장염으로 며칠 동안 고생한 형열 선배님도 죽을 먹어 기운이 너무 없다면서도 힘을 내어 걷고 있다.
어느새 하늘에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불편해지는 시야와 미끄러운 길이 걸음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다.
우산을 쓰는 대원들과 비옷을 챙겨 입는 대원, 그리고 그냥 걷는 나.
가방으로 빗물이 스며들기 전에 배낭 커버를 씌우는데 앞서 걷는 안숙 씨의 배낭이 눈에 들어왔다.
배낭 커버가 없다고 해 급한 대로 일회용 비옷을 꺼내 가방에 두르라고 건넸다.
다시 출발.
점점 거세지는 비를 맞으며 걸으니 대원들의 몸에서 김이 새어 나온다.
길이 엇갈린 대원들을 걱정하는 이사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얼굴은 근엄(?)한데 뒤쳐지거나 길이 엇갈리는 대원들이 나오면 어김없이 염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이암에 이르니 옷과 신발이 이미 축축해져 걷기가 불편했다.
이럴 때 비도 오는데 우이역에서 오늘 훈련은 접고 술이나 마실까요? 제안하는 구세주 같은 사람이라니...
모두가 한 목소리 높여 Yes를 외치고...
쏟아지는 비에 단장님 제안으로 지름길로 우이동을 내려왔다.
우이역 인근 쉼터에서 비를 피하며 점심 식사로 매식을 할지 싸온 음식을 먹을지 의견이 갈렸다.
비로 몸이 젖은 데다 차가운 음식을 먹으려니 한기가 몰려왔다.
제 길로 내려오느라 늦는 다른 조를 기다리며 우리는 싸온 음식을 먹었다.
오후 한 시가 넘었는데 북한산을 넘어가려면 뭐든 채워야 걸을 수 있을 테니...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밥을 욱여넣었다.
정필씨가 정성 가득한 곱게 포장한 음식들을 나눠준다.
되는대로 입에 넣고는 후미를 기다렸다.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지쳐 보이는 대원들이 하나둘씩 쉼터로 내려왔다.
밥을 사 먹으러 나서는 대원과 젖은 양말을 짜는 대원 모두 분주해 보인다.
이대로 오늘 훈련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이왕 시작했으니 비를 뚫고 끝까지 걸어보자는 마음이 교차했다.
오늘 훈련은 어떻게 될까?
어딘가 계속 전화를 하고 있는 이사님의 입을 바라보게 된다.
얼마 후 오늘 훈련은 이만 줄이고 비도 오는데 술 한잔하고 가자는 말을 듣고는 모두들 환호로 반긴다.
빗속에 오늘 훈련도 무탈하게 끝이 났다.
모두 무사함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식당 두 곳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다른 조원들과 섞여 한 잔을 들이켰다.
세상 가장 맛있는 술, 첫 잔이 목구멍으로 쑥 넘어간다.
이런 꿀맛이라니...
비록 온 몸이 쫄딱 젖었어도
한기가 몰려와 덜덜 떨려도
이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이런 멋진 사람들이 나와 함께 걷는다.
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