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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다 Nov 18. 2023

삶이 나를 준비시킨다

근데 내가 준비가 안되었다고요

우린 사귄 지 1년 반 만에 연인관계를 끝내고 친구로 남기로 했다. 서로가 밉거나 큰 갈등이 있던 것은 아니었고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처음 이별을 받아들일 땐 쿨한 마음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지 않게 질척해졌다. 집 앞에 찾아가 문도 두드려보고  절절한 문자도 보내봤다. 술을 먹고 상대가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해대기도 했다. 그러나 군입대를 앞두고 있던 그 사람은 꽤나 완고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몇 번인가 그 사람을 불안하게 했던 것 같다.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릴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거나 면회도 한번 안 갈 거라던가 무심한 말들을 했다. 내 입장에서야 별생각 없이 한 말들이 당사자에겐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그가 말하길 군대에서 이별 같은 걸 했다간 자기가 군생활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친구라는 허울 아래 틈틈이 내게 전화했다.

요즘에야 개인 휴대폰을 가지고 입대를 한다는데 당시엔 면회 온 사람에게 휴대폰을 빌리거나, 정해진 시간에 공중전화 앞에서 순서를 기다려 전화를 하거나, 보초 근무 때 몰래 전화를 하는 것 정도만 가능했다. 누구한테 전해 듣기라도 하는 건지 소개팅이 잡혔다 하면 귀신같이 전화가 왔다. 어느 날은 달이 예쁘게 떴다고, 또 다른 날은 그냥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런 짓을 반년정도 하니까 그가 일병이 되었다. 그제야 여유가 생겼는지 내게 면회를 와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내가 거길 왜 가냐고 튕겼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이미 차편을 알아보고 있었다.

 질척한 이별과 재결합의 과정 끝에 헤어진 연인이 친구 따위가 될 수는 없다는 신념 같은 게 생겼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단다. 헤어진 연인은 같은 이유로 다시 헤어지기 쉽다 했는데 우리한텐 해당이 없었다.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정말로 면회를 자주 가긴 힘들었다. 쉽게 연락하거나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서로 입장이 다르니 당연히 갈등도 있었다. 우린 틈이 날 때마다 편지를 썼다. 분해서 잠이 안 와 편지를 다섯 장씩 쓰다 보면 현명한 결론이 났다.


우린 정말 거의 안 싸웠다.


서로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어서 오히려 서로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했다.


군대를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여자 취급을 수없이 당한 뒤엔 복학생을 뒷바라지하는 어리석은 직장인 여자 취급을 당했고 마침내 남자친구가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고 했을 땐 금방 이별당할 여자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첫사랑인 그 남자랑 연애 십 년 만에 결혼했을 때 나는 의기양양했다. 코흘리개 스무 살 때부터 사랑 입네 하고 연애를 하는 꼴이 세상 물정 밝은 어른들 눈엔 우습고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니 코흘리개들의 사랑도 제법이라고 증명해 낸 셈이었다.


남들은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는 것 같은 사소한 것부터 설거지 당번 정하기 경제권 쟁탈 같은 걸로 크고 작게 다툰다던데 우린 그런 것도 별로 없었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기분을 알아챘다. 시시콜콜한 일도 대나무숲처럼 떠벌렸다.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어도 금방 용서했고 화해했다.


그랬다.


도무지 사별을 예상할 순 없었다.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면 죽을 때까지 같이 살 수 있는 건 줄 알았다.


나는 가끔 그 사람의 꿈을 꾼다.


꿈에서도 우린 이별한 상태였다. 싸운 것도 아니고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설레고 좋은데 왜 헤어졌나 싶었다. 그 사람은 멀리 지나갈 때도 나를 의식해 흘끔거렸다. 그러면서도 다시 만나자는 말엔 단호했다. 정말 이상했다. 나도 여전히 당신이 좋고 당신도 날 싫어하지 않는 것 같은데 왜 우린 다시 만날 수 없는 건지.


그렇게 꿈에서 깬다.


어쩌면 삶이 우리에게 이별을 준비시킨 건지도 모른다.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아이를 양육할 때의 마음 가짐을 준비시킨 걸 수도 있다. 그저 삶이 나를 진작에 준비시킨 것을 내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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