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봐요 엄마, 천사 같은 엄마
너의 삶에 아빠가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
나를 봐요 엄마 나를 봐요 엄마 힘들 땐 우리를 봐요
이렇게 웃어요 웃어봐요
하야하야 호요호요 볼록볼록 볼록볼록
하야하야 호요호요 볼록볼록 볼록볼록
배꼽 나와요~
천사 같은 엄마, 천사 같은 엄마~
(생략)
-(내 아이가 '아빠'를 쏙 빼고 흥얼거린) 극장판 헬로카봇 달나라를 구해줘! OST 중
요즘 민이는 기침을 달고 산다. 아침에 켈록, 저녁에 켈록 나았나 싶으면 어느샌가 또 심한 듯 만듯한 기침을 한다. 아침저녁으로 정신없는 나는 얘가 감기인지 아닌지 헷갈려하다가 약 먹이는 것을 자주 까먹는다.
며칠 전엔 친정엄마가 아이 입에 감기약을 물리며 한숨 섞인 농담을 던졌다.
"어휴 이제 할머니한테 엄마라고 불러. 맨날 약도 할머니가 챙겨주니까 이제 할머니가 엄마야."
그 말이 아이에게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할머니가 엄마하고~ 엄마가 아빠 해! (할머니를 보며) 엄마~ (나를 보며) 아빠!"
나는 조금 멈칫했지만 금세 아이의 장난을 받아치며 웃어주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의 침묵을 눈치챘던 걸까. 아이의 웃는 낯은 그대로였는데,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아이가 갑자기 자신의 말을 취소하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아니야! 아빠 하지 마. 그냥 엄마 해!"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민아, 왜? 엄마 왜 아빠 하지 마?"
아직 단어가 부족한 아이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대답한다.
"아빠는 금방 없어지잖아. 엄마가 아빠 하면 금방 빨리 없어질 거 아냐."
아이 아빠가 죽었을 때, 나는 심장이 뜯기고 내 팔다리가 잘려나간 느낌이었다. 내가 그와 함께 한 십여 년의 시간이 산산이 부서져 내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 와중에 젖먹이 아이를 내려다보며,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갓난아이가 아빠를 몰라 이 끔찍한 아픔을 모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딴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괴로웠다. 그때 내 남편은 내 삶의 거의 전부였다.
19년 간 키우던 고양이 밤이가 죽은 지 벌써 일 년이 지나 밤이가 묻힌 곳을 찾아가는 길, 아이가 물었다.
"엄마, 밤이는 아빠랑 있어요?"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으니 나도 아무렇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짧게 그렇다고만 대답했다.
내 아이의 삶에 아빠란 '상실'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없었던 것, 그렇지만 남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끔 아이가 스쳐가듯이 아빠 얘기를 꺼낼 때면 아이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추억이 없으니 그리워하거나 슬픈 것 같진 않다. 밤이가 보고 싶다는 말은 하면서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말은 않는다. 나는 그게 안심되면서도 묘하게 서운한 생각이 든다.
사는 내내 아빠가 있었던 나는 아이의 마음이 어떨지 알기가 어렵다. 나에게 아빠는 든든하면서도 불편한 존재였다. 좋았던 기억도 있지만 미웠던 기억도 많다. 확실한 건 아빠를 잃었을 때 내가 몹시 아플 거라는 것이다.
최근에 내가 바빠 친정엄마가 아이 하원을 많이 도와주셨다. 가끔은 친정아빠도 함께다. 친정엄마가 보내온 동영상 속에 친정아빠가 아이의 그네를 힘껏 밀어주는 모습이 담겨 있다. 아이는 할아버지를 향해 있는 힘껏 발을 내뻗고 우리 아빠는 그 발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서 있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손바닥에 자신의 발끝이 닿는 순간을 재미있어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그네에서 떨어질까 봐 걱정이 될 만큼 상체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아이의 삶에 소중한 사람과의 행복한 순간들이 쌓여가는 것이 감사하면서도 두렵다. 소중한 것을 알게 된 아이는 상실의 아픔도 알게 될 것이다. 행복했기 때문에 반드시 아플 거라니 무시무시한 필연이다.
지금에서야, 아이가 갓난아기일 때 아빠를 잃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 하찮은 이기심이었음을 깨닫는다. 네가 아빠랑 좀 더 행복한 순간을 가질 수 있었다면 당연히 훨씬 더 좋았을 걸, 그 상실감도 아픔도 네가 받아들여야 할 행복의 대가였을 텐데.
그리고 그건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사람을 잃은 뒤 느낀 아픔의 크기가 내 행복의 크기였구나,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나는 풍성하게 아팠다.
아프렴, 딱 네가 행복했던 만큼만. 너의 고통까지 감당하는 것이 엄마의 몫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