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 '좋아요' 시점
좋아요는 보상이다. 실험실의 개가 종소리를 듣고 침을 흘렸다면, 내 손가락은 진동을 느끼고 팝업창을 누른다. 보상은 특별함과 희소성으로 무언가를 길들이는 힘이 있다. 통장에 찍히는 인센티브에 오늘보다 더 나은 성과를 목표 삼고, 우리 집 강아지도 평소에 못 먹어본 연어 맛 개 껌이면 '앉아, 일어서'에 반응한다. '좋아요'는 돈을 주지도 않았고, 밥을 먹여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분명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 그래서 맛있거나, 귀엽거나, 이목을 끌 만한 세상 모든 것들은 사진부터 찍고 본다.
하지만 그런 보상체계 때문인지 나는 긴 호흡을 잃었다. 좋아요는 비교적 빠른 결과물이다. 빨라진 박자에 익숙해진 나는 기다림이 답답하다. 빨리 다음 게시물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게시물에 조금이라도 긴 글이 있으면 과감히 건너뛴다. 만약 세 줄 요약이라도 해준다면, 읽어줄지는 어디 한번 생각해 보겠다.
원래 인간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생각을 많이 하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기에, 생존을 위해서라면 우리 뇌는 생각을 절약해야만 했다. 그래서 어느 심리학자는 쉽게 생각하려는 인간의 편향을 두고 아끼고 또 아끼는 구두쇠 같다 하여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고 불렀다. (Susan Fiske & Shelley Taylor, 1991)
그렇게 매일같이 빠르게 손가락을 튕기다 보니, 나는 간단함에 적응해 버렸다. 조금만 복잡하면 현기증이 났다. 특히 독서가 그랬다. 논리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복잡하면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이해해보려는 노력조차 귀찮았다. 쉽게 생각하고 싶었고, 주로 궁금증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유튜브를 이용했다. 하지만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어려운 걸 쉽게 생각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들은 복잡하게 생각할 때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읽으려면 정성이 필요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고, 문장을 곱씹으며 좋은 것을 발라내고, 문단을 건너뛰며 맥락을 이해하려는 정성이 그렇다. 읽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불편한 이야기를 피하지 않고, 실패를 바라보며, 나와 전혀 다른 생각들을 만나려는 용기가 그렇다.
책과 SNS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빠른 템포와 간단함은 읽을 때 얻을만한 재미를 하찮게 만든다. 여유란 무엇인가. 한쪽이 한적한 카페에서 커피 사진을 찍는다면, 다른 한쪽은 작가의 이야기를 살핀다. 글쓴이의 이야기가 들어올 공간을 미리 마련한다.
공감이란 무엇인가. 한쪽이 빠르게 피드를 넘기며 더블클릭을 누른다면, 다른 한쪽은 천천히 책장을 넘기고 주인공이 되어 본다. 김영하 작가는 소설을 읽을 때, '주제를 살피면 실패고, 감정을 느끼면 길이 된다'라고 말했다.
자신감이란 무엇인가. 한쪽이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한다면, 다른 한쪽은 스스로의 결핍을 바라본다. 내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존심은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고, 자존감은 나와 비교하는 마음이에요."
이 글은 SNS를 하지 않으면, 책을 읽게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읽다 보니(b), SNS가 내 삶에 얼마나 스며들었는지 발견한 얘기(a)다. 하지만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다르기에, 최소한 알람은 꺼두었다. 그렇게 오늘도 횡재로부터 멀어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