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Dariusz Sankowski on 여행을 갔다. 아름다움을 만났고, 사진으로 담았다. 알고 보니, (소설가) 알랭 드 보통도 같은 고민을 했었나 보다. 그는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며 어떤 장소의 아름다움에서 촉발되는 근질근질한 소유욕을 달랬고, 셔터를 누르며 귀중한 장면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불안을 잠재웠다고 한다.
하지만 사진만으로 아름다움을 담는데 한계를 느꼈는지, 영국의 미술평론가 존 러스킨의 말을 빌려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기념품을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포함하여)이 많다.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여행의 기술』, 2005)
작년에 크로아티아에 갔었다. 광활한 바다 앞에서 처음 먹어보는 해산물 샐러드를 두고, 나도 한번 써보았다. 마음만은 언어의 스펙트럼 속에서 적절한 색감을 골라 채색하는 화가였고 , 이국적인 맛에서 느껴지는 미뢰의 떨림을 표현하는 미식가였다. 하지만 메모장을 들춰보니, 내가 고른 워딩은 다음과 같았다. 개쩐다, 오진다, 지린다.
지금까지 나의 여행은 대략 3가지로 정리되는 것 같다. 하나, 파워 블로거가 소개한 ─ 그들은 순수했을까 대가를 받았을까 ─ 맛집 탐방. 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할 생각으로 골랐던 랜드마크. 셋, 그녀와 아무 데나 어디 멀리 가서 막차만 끊기길 바라는 못된(?) 심보까지. 러스킨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아름다움이 빠진 내 여행은 안일했다.
그런데 여행을 글로 연결하기 위한 굉장한 방법을 발견했다. 장소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와 함께. 이 책은 여행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장소를 우선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기행문 보다도 가장 기행문다웠다. 그는 어떻게 장소를 뒷전으로 둔 채 여행을 말했을까?
기행문에는 여정이 있다.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중국에 갔다. 오랫동안 체류할 생각으로 집을 구했고, 글을 쓰기에 필요한 자료도 챙겼으며, 숙박비와 식비 전액을 위안화로 환전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이유로 인해 입국심사 과정에서 입국을 거절당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좌절이지만 작가는 이 상황을 '내 방 여행'으로 변주했다. 원래 계획은 출국 - 상하이 체류 - 집필 - 귀국이었는데, 그게 출국 - (극단적으로 짧기는 했지만) 상하이 체류 - 귀국 - 집필로 바뀐 것뿐이지 않을까?(p.25) 차라리 어린 시절 중국에 갔던 경험을 끌어들여와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 당시의 스친 경험이, 오늘의 추방으로 인해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된(p.117)것이 아닐까.
기행문에는 견문이 있다. 어떤 여행을 TV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했다면, 과연 이것은 여행일까? 저걸 질문이라고 하냐고 한소리 들을 수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고민해 볼만한 질문이다. 내가 직접 간다면 주어진 휴가기간 동안 몇 곳 가지도 못하고, 배부르지 못한 첫술로 끝날 것이다. (같은 장소를 내년에도 가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TV로 본다면 여러 장소는 물론이고, 다듬어진 정보와 전문가의 편집을 통해 양질의 구경을 할 확률이 높다. 저자는 내가 보는 것을 일인칭의 경험이라 말하며, 티비로 보는 것은 (완벽한) 삼인칭이라 말한다. 이를 덧붙이는 조선시대의 양반과 유럽 귀족의 '대리 여행' ,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바야르의 『 여행하지 않는 곳에 대해 말하는 법』, 소설가 쥘 베른의 『 80일간의 세계일주』. 실제로 방구석 여행자를 지칭하는 'armchair traveler'라는 표현까지. 덧붙여 부연하는 저자의 예시들이 재밌고, 논리적이다.
기행문은 감상이 있다. 작가는 여행을 통해 삶의 안정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나 역시 삶의 안정감을 추구해 오긴 했다. 내가 느낀 안정감은 정해진 날에 따박따박 월급 나오고, 내 집 있고, 퇴직 후에도 따박따박 소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는 것을 안정감이라 믿는다. 그래서 그는 낯선 곳에 도착하고, 두려워하며, 받아들여지고, 안도하고, 또 다른 곳으로 '도전'한다. 거부당한 사람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그들은 내 고향에서는 정체가 있지만(#somebody), 타지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nobody) 때문이다.
또다시 나는 아름다움을 만났고, 사진으로 담았다. 아름다움은 사진만으로 담기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시각에 국한되지 않고, 오감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영하는 여행에서 녹음하고, 스케치하며, 글을 썼나 보다. '발상'은 이것들을 길어 나르는 날개가 된다. 무게가 없는 발상은 날 수 있기에. 비행하던 발상이 고스란히 정착하여 변하는 활자 또한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원초적인 열망을 여행이 긁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여행의 이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