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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림 Dec 16. 2024

5화. 소유했지만 소유물이 아니다

이라 말하고 속박이라 읽는다

5화. 소유했지만 소유물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엄마는 나에게는 외삼촌, 엄마에게는 큰 오빠에게 늘 구속, 폭력을 매우 심하게 당했던 적이 있었다. 꽤 오랜세월동안.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사람은 대물림이란 것이 확실히 존재함을 나는 겪어봐서 안다.

엄마는 아주 어릴 적부터 큰 외삼촌의 폭력을 학습해웠던 것이다. 언니들이 있었지만, 큰 언니는 12살이나 차이가 나서 엄마를 업어키우듯 해, 그 상황이 매우 싫어 엄마도 지긋지긋해 했던 것 같다.

하긴, 그 나이의 이모가 나였더라면, 한창 뛰 놀고 싶은 나이인데, 할머니를 대신해서 거진 집안 일은 큰 이모가 도맡아 했으니, 늘 엄마를 다그치곤 했다.

엄마의 아버지, 나의 외할아버지는 매우 엄하셨다고 했다. 무뚝뚝한 선비스타일이었던 탓에 엄마는 다정함과 따뜻한 배려와 사랑을 베푸는 것을 애당초 학습한 적이 없던 것이다.

처음에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

본인도 원치 않던 본인의 태도와 말투.

그로 인해 우리 모녀는 참으로 많이도 싸웠기에. 많이 싸워보니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도 원치 않았다는 것을.

이미 어린 시절부터 쭉 학습해온 것들이 그런 환경에서 자란탓에 나이 들어서까지 이미 고착이 되어 성격으로 굳혀졌으니, 이 얼마나 본인도 답답했겠나 싶다.

늘 구속과 속박, 폭력 등을 당해오던 엄마는, 비교적 약자인 어린 시절부터의 나에게 대물림하는 현상이 생겨버렸다.

엄마는 늘 시간이라는 압박, 그리고 본인 눈 앞에 내가 보여야 안심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심했던 건, 고등학생 시절이었는데, 항상 야자가 끝나고나면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려서 집까지 걸어오는 시간까지 엄마는 시간을 재곤 했다.

최소 5분에서 10분이상 늦어지면 엄마는 학교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나로써는 너무도 수치스럽고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엄마는 ‘걱정’이라는 명분하에 날 항상 집 안에만 두려 했다. 주말이나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이면 친구들과 가끔은 카페에 가서 수다도 떨고 거리도 돌아다니며 놀고 싶은 사춘기의 나이인데, 나에겐 절대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가끔은 너무 답답해서(전교1등이었다.) 몰래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곤 친구들과 고작 1~2시간을 수다떨기 위해 번화가에 가서 카페에서 놀다 들어오곤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함과 스트레스를 어디에 풀 수 있는 곳 조차 없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가끔은 치곤 했다.

엄마는 걱정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감시에 가까웠다.

엄마의 마음에 만족할 만한 틀 안에서 내가 복종하길 원했다.

긴 서울살이 생활을 끝내고 엄마 집으로 합가하고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오후에 외출을 했는데, 저녁 8시였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다.

저녁 8시부터 왜 들어오지 않냐는 카톡 폭탄 문자들과 전화들, 다그치는 시간 압박과 강요, 그리고 집착에 나는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내가 서울로 20살에 도망친 이유가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폭력적인 모습도 모습이지만, 늘 엄마의 틀 안에서 나는 숨도 못 쉴 만큼 갇혀 지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말이다.

나이 32살에 합가를 했으니, 이미 서른 넘은. 학생들의 시선에선 나는 이미 아줌마나 이모뻘이 되는 그런 나이임에도 엄마에겐 나는 여전히 갓난 아기였을 뿐이었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그 도가 지나치니 내가 숨을 쉴 수가 없다며, 엄마랑 거의 매일같이 싸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엄마에게 이렇게 외쳤다.

“내가 엄마 자식이라서 이렇게 막대해도 되는 거야??!”

그러자, 엄마는 곧

“그럼!! 내 딸이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되지!!!”

물론 엄마는 홧김에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이란 걸 안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이 말을 들은 나는 여전히 심각한 마음의 상처로 타격을 크게 입었다.

아직까지도 나를 속박하고자 하는 엄마의 태도는 나로써는 20년도 더 넘게 겪어 온 도망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 당시 막 오은영박사님이 티비에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라, 인기가 대단했다.

엄마는 나를 금쪽이로 보았지만, 나는 그저 평범한 32살의 이모뻘 되는 나이가 된 여성이었을 뿐이었다.

평범하게 친구들을 만나고 밤까지 놀 수도 있는 일이지만 엄마에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몇 번의 친구집으로 가출을 했고, 엄마가 문자 폭탄을 날릴 때마다 차단을 눌러놓았다.

나도 숨을 쉬려면 이 방법을 택해야만 했다.(사실은 복수에 가깝다)

정말 감사한 일의 오은영 박사님이 티비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엄마가 뜨끔해 하면서 방송을 유심히 보기 시작한 것이다.

속도는 느리지만, 엄마는 이해하기 시작했고, 본인의 태도가 어쩌면 어린 시절의 고착화된 태도로 인해, 나를 많이 구속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엄마로선 변화하려니 굉장히 힘들었을 걸 안다.

내가 밖에 외출을 하고, 밤늦게 귀가 하더라도 엄마는 참고 인내해야하는 훈련을 해야만 했다.

스스로 많이 괴롭지만 노력해준 엄마.

한 때는 엄마의 자식이라서 소유물이었던 나는, 비로소 자유가 생겼고, 여전히 걱정은 되고 가슴이 불안하고 답답하지만 이내 꾹 참고 나를 놓아주니, 엄마에게도 평안이 찾아 온 것을 느꼈다.

엄마 스스로 붙들고 있었던 집착.

어쩌면 나보다 엄마 스스로가 더 괴로웠을 오랜 세월.

이제는, 엄마가 오히려 나가라고 할 정도로, 난 엄마 곁에 더 머무른다.

이렇게 조금씩, 느리지만 우리만의 속도로 지금도 서로를 위해 노력하고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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