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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림 Dec 13. 2024

4화. 틀을 만드려는 자 vs 틀을 벗어나려는 자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무척이나 힘든 것도 있다.

4화. 틀을 만드려는 자 vs 틀을 벗어나려는 자

어릴 적의 엄마는 매우 엄격하고 엄했다. 솔직히 좀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면이 사실 더 많았다.

어느 조직이든 규칙과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룰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체계적인 틀을 건설함으로써 조직적으로 효율적인 생산성을 위해 존재한다.

가정에도, 학교에도, 회사에도 어디에나 틀은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엄마의 틀은 매우 주관적인 틀이었다.

엄마의 틀은 “그 날 기분에 따라”였고,

나의 틀은 항상 “엄마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틀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 틀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웃기긴 하지만 그것 또한 틀이다.

나만의 틀.

누구에게나 자기의 기준에서 만드는 틀은 존재하지만, 어릴 적부터 경험해온 엄마의 틀은 항상 ‘기분’이었다.

나는 그것이 매우 힘들었다.

사춘기에 접어들고 나서는, 더더욱 나의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은 거세졌다.

엄마는 나의 어떠한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굉장히 강하게 그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했고, 아빠와 일찌감치 이혼했던 엄마는 아빠 관련된 생각이 떠오르거나, 연락 소식을 들을 때면 어김없이 나에게 와서 ‘지 애비를 꼭 닮았다’는 프레임을 씌워 나에게 분풀이를 하곤 했다.

나도 안다.

엄마는 엄마의 어린 시절과 처녀 시절 모두 너무 박복한 인생을 살아온 것을 나도 안다.

집안에서 5남매중 막내로 자란 엄마는 늘 아버지의 엄격한 모습에 눌려야 했고, 나이 차가 많이나는 언니들에게 항상 무언가 이용을 당하기 일쑤였고, 그 중 제일 힘든 건, 엄마의 엄마. 그러니 나의 외할머니는 늘 5남매와 외할아버지를 챙기고, 밭일도 하느라 늘 일 손이 부족해 엄마를 온전히 사랑으로 보살피지 못하셨다.

또한 큰 외삼촌, 엄마에겐 큰 오라버니인 그 분은 늘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늘 분풀이를 폭력으로 풀곤 했다.

그 폭력과 학대가 매우 심해서 엄마는 결국 짐보따리를 싸서 집을 도망나올 정도였다.

외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끝까지 붙잡을 수가 없었다. 폭력이 너무도 심한 걸 알았기에.

그런 엄마는 오갈 데 없이 늘 고독하게 자라온 사람이었던 지라, 집에 하숙을 들여놨는데, 하숙생이었던 아빠를 만나 같이 아빠 집으로 향했다.

그게 그렇게 결혼이 된 것이다.

막상 아빠 집에 갔더니, 왠 걸.

친할머니는 작두타는 무당이셨다.

엄마는 속임을 당했다고 생각이 들었고, 방 한 칸짜리 구할 돈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렇게 엄마를 데려왔고, 본인의 엄마가 무당이라는 말을 숨겼던 것이다.

엄마의 시누이인 고모는 늘 엄마를 구박하기 일쑤였고, 그 때부터 엄마는 모진 시집살이를 겪어야 했다. 아빠는 뒤늦은 군대를 갔으니 엄마 혼자 그 낯선 외지인들과의 동침을 해야만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오빠와 나 둘을 낳고, 아빠와 이혼을 하고, 배신감과 상처라는 깊이에 허우적거리다 어떨결에 재혼까지 해, 나에겐 새아빠가 생겼다.

그런 엄마의 인생은 늘 자책과 자괴감, 좌절만 남았었고, 엄마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 살았다.

엄마의 인생이 너무도 안타깝고 마음이 참 시리다.

그러나 엄마는 어디에도 풀 곳이 없었다.

결국, 자기 자신도 모르게 늘 분풀이는 나를 향했고, 그로 인해 나 또한 엄마의 폭력이라는 틀에 갖혀, 틀을 벗어나고자 발버둥 친 것이었다.

엄마를 알고,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의 인생도 이해하지만.

나는 매우 버거웠다.

엄마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늘 나는 죄인이 되어야 했고, 어느 날, 엄마는 새아빠를 시켜, 날 쇠파이프로 몽둥이질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사춘기에 슬슬 접어들면서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인데, 그 나이의 나는 당연히 플라토닉적 이성적인 감정만 생겼을 뿐, 정말 순수하고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눈도 감히 못 마주칠 정도로 맑고 깨끗한 영혼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무엇이 그렇게 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사실 나도 지금도 모르겠다.

그 남자아이의 집에 전화를 걸어 난리를 치며 두 번 다시는 둘이 못만나게 하라고 싸움을 일으켰고, 학교에도 전화해 아이들 단속하라는 듯 한참을 난리를 치고 난 뒤에, 나는 수치감과 모욕감을 느끼며 울고 있는데,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새아빠에게 애 좀 엄하게 때리라고 지시했다.

나에게 강간을 시작한 새아빠에게 쇠파이프를 들게 해, 엎드려 뻗쳐를 시킨 후, 아주 아주 강하게 엉덩이와 허벅지를 수십차례를 맞아야 했다.

나는 크나큰 배신감과 수치심, 모욕감을 이겨내기란 너무 버거운 어린 나이였다.

엉덩이와 허벅지는 걷지 못할 정도로, 피멍투성이었고, 심지어는 살이 다 터져서 진물과 피가 흘렀다.

너무 쪽팔리고 학교에는 당연히 며칠을 갈 수도 없었다.

아마, 나는 그 때부터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모르는새에 말이다.

엄마의 대물림이 곧 나에게로 스며들었고, 성인이 된 나는 아직도 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이전 화에서 바구니와의 전쟁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엄마는 엄마의 알 수 없는 틀이 있다.

그러나 그 틀은 항상 고정되어 있거나 객관적이지 않다.

나는 그런 엄마의 말과 행위를 볼 때마다 나를 억압한다는 생각이 들거나, 도저히 엄마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 싸우곤 한다.

언제까지 내가 엄마의 분풀이 같은 알지 못 할 기준의 틀 안에서 내가 버틸 수가 있을까.

5년이 넘게 정신과 약을 복용한다.

이유는, 엄마가 나에게 극도로 분풀이 식으로 싸움을 걸어오면, 어릴 적의 트라우마들이 한꺼번에 발작버튼처럼 눌러져 폭발해 자살충동을 심하게 겪는 이유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엄마가 고쳐지지 않으니, 차라리 내가 약을 먹어 내 상처와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딱히 방법이 없었다. 엄마를 멈추게 하는 거보다, 그냥 내가 포기하는 걸 선택한 것이 약 복용이었다.

그러나 약도 내성이 생기기 마련이라, 지금도 심할 때면 너무 심한 트라우마로 인해, 나는 공황장애를 겪어야 하고, 내가 내가 아니게 될 때에는 자살시도를 하곤 했다.

지금은 작가의 삶을 시작한 이후로 굉장히 많이 변화되고 완화되었다.

이렇게까지 살고자 발버둥 친 나는 심리학을 배우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비로소 몇년이 걸려서야 나는 나다운 나를 찾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트라우마라는 틀 안에서 살고 있고, 엄마는 놓지 못하는 틀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의 과거를, 상처를, 트라우마라는 틀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도 나를 사랑한다.


무척.


그러나 우린 사랑하면서도 고슴도치처럼 서로의 마음을 찌를 때가 많다.


그래도, 언젠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엄마.

난 엄마를 절대 놓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니까.

<이번 편의 자세한 이야기는 메인에 있는 책 “야, 저 부추꽃도 잘만 사는데.”에서 디테일한 스토리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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