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재가 노래하는 곳.

현대인의 우스운 고민거리

by 나린글
가재가 노래하는 곳.jpeg

별점: ★★★★★



지인에게 추천받은 도서 가재가 노래하는 곳. 제목만 읽어서는 무슨 내용일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책이었다. 가재가 노래를 한다고? 어떤 비유를 이야기하는 건가... 아니면 영어의 특정 속담을 이야기하는 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든 생각은 작가의 생생한 묘사력이다. 장소에 대한 묘사, 늪지대의 냄새, 아름다운 동물들과 조개껍데기의 색깔, 감촉까지. 그 모든 것을 다 느낄 수가 있었다. 작가의 직업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었다. 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평생 야생동물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이 책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도 시청을 하였는데, 나의 상상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부분들을 영화가 잘 보완하여 메꿔주었다. 특히 반복해서 묘사되는 주인공의 거처에 대해서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영화를 본 후 그에 대한 궁금증이 대부분 해소되었다.


주인공인 카야는 올리브 빛 피부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이다. 그녀는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혼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카야는 끈질기고 억척스럽고 강하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무 쓸모 한 아버지를 봉양하여 그는 삶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다. 거칠고 힘겨운 늪지 생활로 인해 카야는 마치 야생동물처럼 변해간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풀숲 뒤에 조용히 숨고, 포식자가 떠날 때까지 기다린다. 친구는 있을 리가 없다. 당장 아침에 먹을 식량이 문제이다. 다행히 부둣가의 점핑이라는 별명을 가진 상점 주인과 그의 아내가 카야를 아껴, 간식이나 옷가지를 가져다주고 카야로부터 굴을 구매한다. 그들 부부로 인해 카야는 긴 시간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구실이 생겼다.


상점 주인 부부는 둘 다 흑인이다. 카야는 백인 여자아이이다. 이 책의 배경은 1950년대부터 7-80년대까지 두루 다루고 있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무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책에서도 물론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백인 여자아이를 돕기로 결심한다. 우리의 관점으로 보자면 일제 강점기가 막 끝난 시점 일본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국인 부부어떤 일본인 여자아이를 도와주는... 그런 그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이야기의 묘미는 성장해가는 카야를 부모의 입장이 된 듯 지켜보는 것이다. 카야가 굴을 판 돈으로 재료를 구매해 이런저런 요리를 시도해 볼 때, 카야가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 카야가 어엿한 숙녀가 되었을 때.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그 순간들을 헤쳐나가는 어리고 순수한 영혼이 기특하기만 하다. 고난이 그에게 닥칠 때 어린 카야의 곁으로 가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도 인간이기에. 특히나 부모에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이기에, 카야의 사랑을 향한 갈구는 누구보다 강했다. 하지만 비겁하고 못난 인간들은 그를 이용하고 버렸다. 마치 카야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듯.


하지만 글자를 읽기 전부터 생존하는 법을 배운 카야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끝까지 갈구하고 끝까지 노력하고 끝까지 싸웠다. 그에게 부당한 일이 생기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발했다.


카야를 통해 배운 점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전기도, 가스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돈을 벌어 자기 자신과 아버지를 먹여 살려야 했던 카야는 진정한 삶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에게 분명 살고자 하는 동기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살아야 하니까 살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삶의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철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여가생활을 가진다. 카야에게 그런 사치 따위는 없다. 그저 지금 당장의 저녁 식사와 불을 피울 성냥에 대해 생각한다. 진정한 삶의 의지인 것이다. 진정한 빈곤을 모르는 우리 세대가 알아야 하는 바로 그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나 또한 포함이겠다.) 가난함을 모른다. 정말이다. 나의 남편은 멕시칸이다. 그래서 그와 함께 멕시코에 2년 정도 산 경험이 있다. 그 당시, 남편의 먼 친척 장례식장에 방문한 적이 있다. 내가 지내던 동네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장소였는데 어떻게 도착했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친척은 남편의 사촌으로, 30대 정도의 젊은 청년이었다. 그의 가족에게는 크나큰 비극이었다. 하지만 내가 놀랐던 부분은 '30대 청년의 장례식'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었다.


그 가족의 집은 회색 벽돌을 쌓아 만든 집이었는데 제대로 된 창문이 없어 그저 벽에 뻥 뚫린 구멍이 여러 개 나 있었다. 가장 충격받았던 부분은 바닥이었다. 바닥이 없었다. 화장실을 사용하려 실내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흙, 모래, 먼지, 물 등이 뭉쳐 만들어진 단단한 흙바닥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지붕도 제대로 된 지붕이 아니라 어디선가 구한 건축 자재 등을 얹어 놓은 형태였다. 모든 가구는 낡거나 망가져 있었고 제대로 구실을 하는 것은 없었다. 화장실 천정에는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와 얼굴만 한 거미들이 잔뜩이었다. 변기 물도 제대로 내려가지 않았고 사람이 편안하게 씻을 수 있는 공간 같지 않았다.


그들은 과연 하루에 몇 번 정도 사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할까? 살아가야 하는 동기나 삶의 목적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있을까? 우리가 고민하고 우울하고 두려워하는 삶의 목표는 사실 사치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치인 줄 모른다. 눈을 돌리면 누구나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 누구도 오늘 저녁에 필요한 땔감의 개수나 이번 주 필요한 식수의 양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물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또 해당되는 도시인들을 기준으로 했다.) 어떤 이름난 학교를 진학할지, 어떤 직장에 들어가야 잘나가는 티가 날지, 어떤 유행하는 음식을 sns에 올릴지를 고민하고 그로 인해 우울해한다. 남과 비교하며 누가 더 잘나가는지 경쟁하고 누가 돈을 더 잘 쓰다 대결한다.


그 대결에서 이기면 무엇이 남는가? 10분 동안의 만족감? 이 세상에는 그리고 대한민국에는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거짓 고통이 아니라 생사가 넘나드는 고통이. 삶이 감사하지 않은가? sns에 누군가는 새 차를 사고 누군가는 집을 샀다고 자랑을 하는가? 내 삶이 보잘것없이 느껴지는가?

그래도 당신에게는 제대로 된 지붕과 바닥이 있지 않은가.


카야의 삶을 통해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포기가 아닌 살아갈 끈기와 이겨낼 의지를 배울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의 삶을 통해 우리의 고민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감사, 또 감사하자.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을 얻을 수 없느니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럼에도,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