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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io Apr 26. 2021

오스카 시상식에서 든 생각

2021년 4월 25일 미국에서 오스카 시상식이 열렸고,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응원했듯 윤여정 배우님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얻은 세계적인 명성에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했다.

동년배의 어르신들은 아직 자신도 늦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보다 어린 사람들 역시 지금의 괴로움이 훗날에 기쁨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거란 작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한마음 한뜻으로 기뻐하는 것은 아닐까.


기사가 연일 쏟아질 테고,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이 앞다퉈 나올 테니 나까지 섣부른 판단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 마음속에서 피어난 단상을 정리해보고 싶다.



#1

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입시를 했다. 그리고 재수까지 8년을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학에 막상 들어가서는 놀고만 있을 순 없었다. IMF 이후여서 다들 취업 걱정을 하는 분위기였고, 그중에 쉴 줄 몰랐던 나 역시 뭔가를 계속 사부작사부작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쉬지 않았던 거 같다. 물론 저녁에 친구들과 술 마시거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어릴 때부터 그냥 쉬는 거, 그냥 노는 거... 그러니까 "무목적적인 유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매 순간 다음을 생각하며 지냈다. 그러다 삼십 대에 정신 차려보니, 나의 몸과 마음엔 과부하가 걸려있었다. 행복해야 할 결혼생활과 육아도 나에겐 그저 주어진 역할과 책임, 의무였다. 그러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육체적으로도 과호흡 혹은 산소부족.. 같은 증세가 올 정도로... 그러다가 많이들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뭐하러 이러지?"


십 대와 이십 대에는 막연히 '더 밝은 미래'를 위해서라고 항상 나 자신을 다그쳐왔었다. 왜냐면 그렇게 배워왔으니까.... 

중고등학교 때는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가! 좋은 대학 가면 그때 놀아! 좋은 대학 가면 좋은 곳에 취직하거나 멋진 남자랑 결혼할 거야!


대학 때는

교수님 말 따르면, 00에 취직시켜줄 거야. 저 선배한테 잘하면 00을 소개해줄 거야. 


회사에서는

이번 일 잘 되면 과장으로 승진해줄게. 이번 건만 잘 되면 우리 회사가 엄청 크는 거야.


그리고 결혼해서는

조금 더 아끼면 노후에 편할 거야. 조금 더 참으면 아이가 더 똑똑해질 거야. 엄마가 안 참으면 아이한테 안 좋아. 네 의견을 줄이면 다 편해. 명절에 좀 불편해도 참아, 일 년 중에 며칠 안 되잖아.


이렇듯 매 상황마다 조금씩 다른 말이지만, 모두 오늘을 인내하면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난 허리디스크로 수술 직전까지 갔고, 하던 강의는 쉬어야 했지만, 육아는 아픈 허리는 움켜잡고 해야 했다. 그리고 혹시나 아프다는 소문 퍼지면 일이 안 들어올까 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안 아픈 척해야 했다.


그러다 내 마음속에서 "펑"하고 터졌다.

도대체, 그 밝은 미래는 언제 오는 거야! 오긴 오는 거야?


#2.

그래서 크게 깨달았다. 그런 날은 없다고! 지금 당장 좋은 거 그게 다라고!

하필 그때 니체를 공부하고 있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몸이 아프다가 조금 나아졌을 때, 머리가 흐리다가 밝아졌을 때의 그 기쁨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 25년 넘게 갖고 있던  "내일을 위한 오늘의 희생"을 던져버렸다. 그냥 지금 당장의 소소한 행복이 더 의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때 그때 에너지를 얻어야만, 남들에게 더 여유롭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내 자식과 가족에게도 말이다. 


#3. 

"꽃보다 누나"에서 윤여정 배우가 인터뷰 중에 자신도 50대, 60대가 더 처음이었다고 했다. 모든 인간은 어른이 되었다고 다 알게 되는 게 아니라, 매 순간 다 처음이고 시도해보는 거라고 말이다. 그 말이 좋았다. 그래, 나의 사십 대도 처음 겪는 거니, 생각했던 것처럼 안정적이거나 "불혹, 즉 의심이 없는 상태"가 아니어도 괜찮아하고 말이다.


#4.

2020년이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계가 다 막혔다. 그런데 유일한 소통로인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 음악, 심지어 국악, 한국 드라마, 영화, 음식 등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BTS의 세계적 팬덤이으로 비틀스가 되었고, 기생충이 로컬 영화상인 오스카에서 수상을 하였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그래도 다들 우리 것을 좋아해 주니, 그저 우리 것이라 좋아한 것이 아니라 다들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으로 우수한 것들을 내가 좋아했구나라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5.

연예인 걱정은 하는 거 아니라고는 하지만, 윤여정 배우님이 힘든 시간을 겪었다는 거 웬만한 한국인은 다 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자신이 미국에서 돌아온 후, 어떠한 작은 배역도 살기 위해, 두 아들을 위해서 했다는 얘기를 했다. (이번 오스카 수상소감에서도 두 아들들에게 계속 나가서 일하라고 잔소리해줘서 고맙다고 수상소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연세가 든 이후 좋아진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을 고를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을 듣고 정말 반성 많이 했다. 프리랜서로서 일을 고를 수 없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했고, 싫은 일도 어쩔 수 없이 맡은 후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후회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주어진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시점인 거 같다. 


그런데, 그 고생을 했던 윤여정 배우님이 오스카에서 여우 조연상을 수상하였다. 


#6.

순간, 시니컬하게 버렸던 "밝은 내일"에 대한 기대에 대한 희망의 불꽃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완전히 꺼져버린 줄 알았지만, 내 마음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불꽃이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예전처럼 오늘을 희생해서까지 참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면 먼 미래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좋은 소식이 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 형태가 세계적인 명성일 필요나 일확천금일 필요도 없다. 딸의 아이가 "할머니 책 너무 좋아"라고 웃으며 안아준다면, 누군가가 "당신의 글을 보고 감동받았습니다"라고 말해준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그래도 조금 현실적인 욕심을 부려본다면,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나중에 바다 혹은 호수가 보이는 이층 집 서재에서. 벚꽃이 보이는 창문가 책상에 앉아 책 보고 글을 쓰는 꿈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7.

그리고 오스카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된 영화들의 메시지도 그렇지만, 수상소감을 하는 이들 역시, 소수에 대한 관심과 인종차별에 대한 꾸짖음, 다양한 문화의 수용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 지금 이 시대는 그동안 주류가 아니고, 돈과 권력이 없고, 백인이 아니고, 남자가 아니어서 숨죽여야 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찌 보면 과거에 가장 기득권이었던 미국의 시상식에서 이러한 색채를 지우려 하니 말이다. 그렇게 오래전 내가 살던 세상과 지금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8.

그래서 더 이상 주눅 들 필요는 없을 거 같다. 그렇다고 갑자기 모든 사람이 강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각자를 인정해주고 가치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밝은 미래? 지금이 그것은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확실히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이렇게 변화의 가능성만으로도 마음속 희망이 살아날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오늘을 희생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즐거운 오늘을 보내면 가치 있는 내일이 올 수 있다는 희망은 믿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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