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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Feb 21. 2020

도심 속의 나무늘보

2019. 11. 27(수)

낮에는 생활소음, 밤에는 취객의 소음으로 북적이던 동네를 떠나 인왕산 아래로 이사 온 후로는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느긋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지금 사는 마을에는 지역주민의 수도 적고, 어르신들이 많은 동네라서 유달리 다른 동네보다 고요한 밤이 일찍 찾아온다. 달라진 환경에 적응을 하니, 마을버스를 타고 인근의 지하철역만 나가 붐비는 사람들과 각종 프랜차이즈 간판을 볼 때 '읍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제는 신혼생활을 보냈던 연남동이나 화방이 있는 홍대에 갈 일이 생기면, 대도시에 가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래서인지 외출할 채비를 할 때면 나름 여행자의 기분으로, 텀블러라던가, 이동하면서 읽을 책이라던가 하는 소소한 짐을 가방에 더 챙기거나, 좋아하는 옷을 골라 입곤 했다. 



지난 츄잉룸 송년회 때, 정은 작가가 자리에 참석한 모두에게 연말 선물로 각자에게 어울리는 패턴의 귀여운 양말을 한 켤레씩 나눠주었다. 나는 나무늘보가 반복적으로 프린트된 귀여운 양말을 받았다. 원래 말과 행동이 느리기도 하거니와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에 나오는 나무늘보를 닮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온 터라 나와 정말 잘 어울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세탁을 하고 서랍장에 넣고 아껴두었는데, 오늘은 홍대에 나갈 일이 있으니 기분을 낼 겸, 그 나무늘보 양말을 꺼내신고 집을 나섰다. 



다음 달에 있을 전시 준비로, 불광동의 목공방에서 짠 나무판을 들고 홍대에 있는 출력소까지 다녀와야 했다. 세 개의 나무판을 하나로 포장하니 묵직했다. 목공소에서 테이프로 손잡이를 만들어주시긴 했지만, 손마디가 끊어질 것 같은 감각을 느끼는 것보다 팔에 끼고 들고 가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나무판의 크기는 40X40cm로, 두께감이 있는 나무판들을 한 팔로 감싸 안아 들고 걷자니 조금 벅찼다. 백팩에, 무거운 짐까지 들고 걷자니, 걷는 속도가 점점 더 느려지더라. 불광역에서 3호선을 타고, 합정에서 환승해 호미화방에 들려 재료를 사고, 홍대 정문까지 걸었다. 가는 길 중간에 벤치가 보일 때마다 짐을 내려놓고 쉬었다. 팔에는 힘이 점점 빠졌고, 어깨도 아파왔다. 우여곡절 끝에 홍대 정문 앞 출력소에서 대형 출력을 마쳤다. 이제 집에 갈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이 나무늘보에게는 홍대 정문 앞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가 너무나 짧게 느껴지더라. 신호가 끝날 때 즈음에서야 느지막이 건넜던 것도 아니고 아직 횡단보도의 삼분의 일 지점이 남았는데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서 적잖이 당황했다. 나 때문에 차를 멈추고 기다리는 운전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나름 속력을 내어) 바삐 인도로 올랐다. 그동안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내오신 걸까. 실수로 물 컵을 쏟거나, 운전 시 시야가 좁아져서 사고가 날 뻔하거나 등등의 경험을 하면서 확실히 임신 후에 반사 신경이 느려졌단 걸 깨닫긴 했지만, 횡단보도를 보행자 신호 안에 걷기 조차 어렵게 느껴지는 때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노년기의 체험을 서둘러하게 된 기분마저도 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임산부 석 마다 청년들이 앉아 있었다. 임산부 석이 다리를 쭉 뻗기에 좋은 자리라는 걸 알지만, 안 그래도 배도 부른데 오늘처럼 짐이 많은 날에는 비어있는 임산부석이 간절하다. 결국 동네에 다다르서야 겨우 빈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무늘보는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오늘의 피로감 때문에 내일도 정오까지 늦잠을 잘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맞이하는 고요함이 너무 소중하다. 당분간은 '시내'에 나갈 일이 없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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