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1. 17(금)
요즘 정말 왜 이럴까. 물을 쏟는 일이 잦아졌다. 어제는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한 친구의 음료수 컵을 손으로 쳐서 쏟았고, 오늘은 스타벅스에서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다가 테이블에 내려놓던 잔을 쏟아버렸다. 그 전에는 숲 해설가 선생님들과 함께 간 식당에서 정수기 앞 물컵을 떨어트려 바닥을 삽시간에 물바다로 만든 적도 있다. 평소에는 절대로 하지 않던 실수인데... 매장의 직원분들이 손수 치워주셨지만, 그분들을 수고스럽게 만든 상황이 부끄러웠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임산부인 나에게 꽂히는 시선이 싫기도 했고. 하지만 실수는 실수이지 않은가. 운전할 때에도 차선을 변경하는 옆 차선의 차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경우가 있어서 시야가 전보다 꽤 좁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임신기간 동안에는 반사신경이 둔해진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생각해보면 반사신경 외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다. 잠자는 자세, 걷는 모습, 먹는 취향...
한 번은 한 껏 붐비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나도 모르게 안전을 위해 배를 손으로 감싸는 제스처를 해서 놀랐고, 임신 중기에 들어서는 전신 거울로 본 내 모습을 보고, 힙라인에 살이 꽤 붙어서 살아있는 아기 범퍼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던 날도 있었다.
'모두 이런 변화를 겪고서 엄마가 되었던 거겠구나'하고 생각하니, 왜 이전 모습 그대로는 '엄마'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된다. 녹색 신호 점멸 전에 횡당보도를 건널 수 없었던 날, 대중교통 이용할 때 임산부 석에 앉지 못해 힘들었던 날, 짧은 거리도 달리지 못해 눈 앞에서 버스를 놓쳤던 날, 속이 불편해서 밤잠을 설치던 날, 치골이 아파서 바지를 입을 때마다 절절매던 날 등... 여러 날 동안의 여러움을 겪고서야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보호자, '엄마'가 될 수 있는 이 과정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이 서른이 넘으면 사람은 변할 수 없다고 늘 믿어왔는데, 임신은 경험하는 이를 여러모로 변화시키는 것 같다. 이 변화의 과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을 내리진 못했다.
아기를 만나는 과정이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류의 고백이 나오면 아무리 절절한 로맨스라 하더라도 마음이 식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전과 달라진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를 내려놓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내가 부서졌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약한 부분을 열 달 동안 깨달았으니, 자신보다 더 약한 아이를 잘 보듬을 수 있으리라는 자연의 섭리인 걸까. 마꼬를 만났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