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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Sep 25. 2019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만,

2019.7.10(수)

밤 아홉 시였나. 시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핸드폰 너머의 어머님은 밖에 계셨다. 이 시간에?

잘 들어보니, 김치를 주러 우리 동네에 와 계시단다. 잠깐 집에 들르겠다고 하셨다. 이상했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실 분이 아닌데,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혹시 아버님과 무슨 일이 생기셨던 걸까? 우리 집은 엄마랑 아빠가 싸울 때면 둘 중 하나가 집을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었던 터라, 경험에 따른 상상이 뒤따라 걱정이 되었다. 하필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는데 차도 집에 두고, 버스를 타고 오셨단다. 손이 크신 어머님 성향상 정말 김치만 가져오셨을 리도 없는데. 김치통만으로도 무겁고.


어쨌든 어머님은 지금 김치통을 들고 000동 버스 정류장에 서계시다고 했다. 집 공사할 때 여러 번 왔다 갔다 했어서 길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둑해지고 비까지 내리다 보니 길이 낯설게 느껴지신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우산을 들려서 토토를 내보냈다. 어머니는 저녁 식사도 하고 아무것도 주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 부부는 둘 다 퇴근이 늦었고, 포카 저녁 산책까지 시키고 온터라 아직 식사 전이었다. 식사하고 오셨더라도 한 숟갈이라도 뜨고 가시라고 권했는데 어머님은 극구 사양하셨다. 우리는 취향껏 저녁상 차릴 준비를 했다. 토토는 라면을, 나는 냉면을 끓여먹었는데 어머님은 밥상에 마주 앉아 우리가 밥 먹는 모습을 그냥 쳐다보셨다. 어머님은 매실차를 조용히 마시더니, "아기 생기면 이 집이 좁겠네..."라고 하셨다. 그리고 농담 반, 진담 반 "포카는 할머니랑 우리 집에 가자"라고 알맹이 없는 말만 하시다가 집으로 돌아가셨다.


택시를 잡아드린다고 했더니 버스 타고 가면 된다며 사양하시는 것을 겨우겨우 설득해 콜택시를 불러드렸다.  어머니를 배웅해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토토가 놀랄만한 말을 했다.

"있잖아. 나 아까 깜짝 놀랐어. 엄마가... 날 보자마자 이런 말을 하더라?"

"응? 어떤 말?"

"엄마가 우리 결혼하고서 단 한 번도 나리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이틀 전에 엄청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타나서는..."

"내가???"

"응.. 그렇게 나타나서는 '어머니! 저 임신했어요!'라고 했대."


네??? 어머님? 제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틀 전이라면... 내가 병원에 혼자 가서 심장박동 소리를 듣고 온 날이 아닌가!(소름!)

안 그래도 지난 주말에 친구들이랑 용주사로 템플스테이에 다녀왔는데, 어쩐지... 스님이 나한테 잘해주시더라... 나는 그런 곳에 가면 대부분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있다 오는, 존재감 없는 타입이었는데. 그 절의 비구니 스님은 절을 산책할 때도, 식사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때도, 마지막 날 뒷산 산책할 때도 어디선가 뿅 하고 나타나셔서는 곁에서 계속 좋은 얘기를 해주셨던 것이 생각났다. 불교 신자이신 어머님에게 손주가 생길 것이라는 응답이 꽂힌 것일까... 믿기지 않는 상황에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양가 어르신들께 임신 소식을 안정기가 지나고 말씀드리기로 했었다. 시부모님에게는 첫 손주라 부담감을 느끼게 될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 임신을 준비하고 아이가 생긴 게 아니라서 나의 몸과 아이의 건강상태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우리 임신한 거 맞다고 말씀드렸어?"

"아니. 그냥 '아~ 그랬어? 신기한 꿈이네!'하고 얼버무렸지!"

토토는 자신감 있게 웃으며 어머님께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고 뿌듯해했지만, 요즘 이 사람... 아빠가 된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에 다 티가 나는 터라...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님은 눈치채셨을 것 같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안 드려서 모른 척해주시셨던 게 아닐까. 그런데 내가 이 상황에서 토토를 못 믿는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어머님 꿈에 나타나서 내가, 내 입으로 말했다는데!


나도 아이가 생겨서 내심 기뻤을까? 그래서 그 에너지(?)가 어머님께 닿았던 걸까? 실제로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하는구나. 지난번의 태몽도 그렇고, 임신은 신기한 일의 연속이다.

그나저나 아이는 건강한 걸까. 우리가 과연 잘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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