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이의 못난 고백

2019.7.25(목)

by 스튜디오 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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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이와 일러스트 페어에 다녀왔다. 솜이는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친한 동생의 오랜 친구인데, 한 달 전쯤 우연한 기회로 셋이 만난 후로 연락을 하게 되었다. 단 둘이 만난 건 처음이었지만, 솜이도 일러스트에 관심이 많은 친구라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일부러 사람들이 붐비는 시간을 피하려고 오후 느지막이 약속을 했는데, 예상과 달리 매표소 앞에는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서 차례가 되길 기다렸고, 마침내 설레는 마음으로 입장을 했다. 페어장의 분위기는 젊고, 활기가 넘쳤다. 북적북적한 인파를 뚫고 작가님들의 솜씨를 한 껏 구경했고 서로의 그림 취향을 확인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한 시간 반 정도 걸었나? 슬슬 다리가 무거워진다. 요즘 이 시간에 낮잠을 잤었는데, 습관이 들어서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날씨가 흐렸는데 기분 탓인가...

예전의 나 같았으면 페어의 개장 시간에 맞추어 도착해 폐장시간 때까지 모든 부스를 샅샅이 훑고 다녔을 텐데 이제는 하나하나 들여다볼 기력이 없고, 기력이 없다 보니 의욕도 없다. 임신은 안 먹던 음식도 먹게 하고, 안 자던 낮잠도 자게 만들면서, 체력마저도 떨어지게 하는 일이란 말인가! 어쩐지 요즘 밤만 되면 이불 위에서 기절하더라니. 체력이 떨어진 게 맞나 보다.... 나는 튼튼이의 기량을 가지고 태어났었다. 아픈 곳도 없었고, 운이 좋게도 다친 곳도 없었다. 학교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체육 선생님들의 관심만큼은 예외였다. 늘 주위에서 운동신경과 건강만큼은 타고났다는 말을 듣고 살았는데 남들과 달리 체력이 특출 나다고 생각하지 못했고, 세상 사람들 모두 나 정도의 체력은 가지고 산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대학생 때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도 기숙사에 올라가 과제도 하고, 그날 오전 수업에 들어가 출석도 하는 튼튼이의 기량을 한껏 뽐내며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졸업 후에는 하고 싶은 일이라며, 야근은 물론 철야가 일상인 분야에만 이력서를 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건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체력을 주로 밤새 술 마시는 데에만 갖다 바쳤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그래서 다양한 친구를 알게 되었고, 많은 것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나의 체력에 의문을 던진 최초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지금의 나의 남편, 토토다. 우리는 연애 시절, 산책을 즐겼는데 밥 먹고 걷고, 차 마시고 걷고, 버스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도 일부러 걷곤 했다. 토토의 손을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일이 참 좋았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바로는 토토는 그때 참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토토 역시도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고, 야근도 일상이었던 분야의 일을 했던 터라 주말에 나를 만날 때는 늘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는데,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우리는 걷는 걸 좋아하는 사이'라고 (나 혼자) 생각해 자꾸만 걷자고 했던 것이었다. 나는 함께하는 산책(토토는 그건 산책이 아니라고 한다)을 좋아했고, 토토는 잘 걷는 나를 좋아해 준 셈이다. 마꼬가 찾아온 후로 나는 '보통 사람들'의 체력을 직접 체험하며, 여러 가지 부끄러운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남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못난 기억들... 지금도 생각하면 낯이 너무 뜨겁다.



페어를 두 시간 정도 돌아보았던가. 더 이상 그림도, 굿즈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몹시 지친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태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일을 해본 경험이 없어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저 이 정도에 지쳤다는 사실에 놀라고만 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솜이가 먼저 "언니, 우리 잠깐 쉴래요?"라고 물어봐줬다. 그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페어장 한편에 마련된 카페에 찾아가 자리를 잡았다. 마실 것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더니 숨이 틔었다. 솜이도 쉬고 싶었다고 했는데, 어쩌면 솜이가 내가 임신한 걸 알고 배려해준 걸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솜이에게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음료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솜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족 이야기, 전공과 작업 이야기, 반려견 이야기... 솜이는 어릴 때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행히 다 나았다고 했다. 예전의 나라면 어땠을까? 피곤해하는 솜이 혼자 쉬게 하고, 혼자 페어장을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예전의 나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그리고 그렇게 각자 시간을 보낸 뒤 솜이와 어색하게 헤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작가님들의 작품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지만, 새로 사귄 친구와 테이블에 머무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서른여섯에 새 친구를 사귀었다. 그것도 이전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이것은 물론 마꼬의 덕분이다.

190725_1_2.jpg 혼자서만 건강하고, 혼자서만 체력 좋던, 과거의 나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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