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30(화)
지난번 일러스트 페어에 다녀온 후, 솜이가 집으로 초대를 했다. 초대를 받고 나는 안나 작가랑 솜이네 집에 놀러 갔다. 안나는 예전 공동작업실에서 만난 친구이고, 안나와 솜이는 조계종에서 연 '예술가들을 위한 템플 스테이'에서 만났다. 우리는 솜이네 반려견 '점프'도 만났다. 점프는 어릴 때 점프를 잘해서 이름이 점프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집 털 동생 포카랑 달리 점프는 사람에게도 살갑고, 무척 순했다. 사실 점프와의 만남은 이 날이 두 번째였다. 솜이를 알게 되기 전, 우리 세 가족이 점프를 먼저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년 가을, 포카를 위해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연남동에서 인왕산 끝자락에 위치한 공기 맑고 고요한 동네, 홍제동으로 이사를 갔다. 겨울 동안은 포카가 동네에 적응하는 시기를 보냈고, 올 2월, 봄햇살을 받으며 홍제천을 따라 부암동까지 산책을 갔었다. 부암동에서 토토랑 차도 마시고, 윤동주 문학관도 구경하고 집에 돌아가려던 길. 이미 한 시간 반 가량을 걸어왔기에(반려견과 이동하면 노즈 워크와 배변할 시간도 필요하므로 시간이 더 걸린다) 같은 시간을 들여서 돌아가는 것보다 지름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와! 인왕산을 넘어가면 30분 만에 집에 갈 수 있대" 내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인왕산? 갈 수 있는 길이 있어?"하고 토토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이 사람... 그런 미심쩍은 얼굴을 하다니. 하지만 그는 나에게 그런 얼굴을 할 만도 했다. 늘 새로운 길로 가보자는 나의 말을 따라나섰다가 호되게 고생한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둘 뿐이면 상관없는데 포카까지 있으니(지난여름, 제주도에서 안 가본 길로 가자는 내 말을 따라 들었다가 풀독도 오르고, 포카는 진드기도 붙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의심할 만도 하다. 하지만 집까지 가는 방향이 또렷이 표시된 지도 어플 창을 보여주니, 토토도 안심한 듯했다. 토토는 아무리 길이 가팔라도 한 시간 반을 걷는 것보다야 삼십 분만 힘든 게 낫지 않겠냐는 무모한 나의 의견에 (또) 설득당해 인왕산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새순이 돋기 전이니 전처럼 풀독이 오를 일도 없고, 포카를 안고 이동할 일도 없을 것이다. 또, 포카는 모견이 포인터이기 때문에 지형 활용에 용이한 체력을 가졌다. 포카보다는 둔한 몸뚱이를 가진 우리 둘이 더 문제였다.
인왕산 입구를 찾아가는 길에 한적한 주택가 골목이 나왔다. 아직 산 길은 시작도 안 했는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시 내려갈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토토의 눈치를 살폈다. 이러다가 다시는 나랑 아무 데도 안 간다고 하는 건 아닌지! 그런데 눈 앞에 산 입구가 보일 무렵, 어디선가 목줄이 풀린 검은 진돗개가 우리에게 짖으면서 달려왔다. 포카를 비롯해 우리 셋 다 긴장했는데, 검은 개는 조용히 포카와 인사를 나누더니 금세 자기가 있던 방향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포카는 모처럼 친구랑 놀 수 있나 싶었는데, 친구가 금방 가버려서 서운해했다. 산 초입에 '멧돼지 출현 주의', '무속인 출입금지'라고 적힌 현수막을 보고 긴장했다. 곧 있으면 해가 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초조해졌다. 자갈과 바위가 많은 인왕산은 어딜 밟아도 걸음이 죽죽 미끄러졌다. 이런 길도 어플로 안내한단 말인가! 대한민국 애플리케이션 산업이 이렇게 발달했구나!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홍제동까지 겨우 넘어왔다. 이동 시간은 어플에서 말한 대로였다. 마을이 보이자 안심이 되어서 잠시 바위에 앉아 쉬기로 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갑자기 산에는 왜 온 건지, 언니랑 오빠가 이해가 안 됐는지 포카는 소리 내서 울었다.
친구의 소개로 솜이와 처음 만났던 날, 내가 인왕산 아랫동네에 산다고 하자 솜이도 인왕산 가까이 산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 집 포카처럼 솜이네도 검은 개를 기른다는 것도. 또 포카랑 부암동으로 산책을 갔다가 호되게 고생했다는 것도 말해주었다. 나는 솜이에게 고생의 경험을 말하다가 순간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탄성을 질렀다. '아... 그날 우리가 만났던 게 솜이네 강아지구나!'
점프는 강아지 간식을 살곰히 받아먹었다. 사람 옷에 발도장을 찍지도 않고, 참 얌전했다. 안나도 이렇게 순한 개는 처음봤다고 했다. 점프 옆에 앉아서 만져주려고 안나가 앉자, 점프는 안나를 따라 엎드렸다. 솜이가 모히토를 만들어준다고 했기 때문에 집에서 기른 민트를 한 움큼 따갔다. 나는 논알코올 모히토를 마셨다. 우리는 솜이가 만들어준 모히토와 라쟈냐와 비빔국수, 솜이가 후식으로 준비해 준 아이스크림, 과일, 과자를 정말 배 터지게 먹었다..... 그리고 보드게임도 하고 책도 읽었다. 솜이네 방 천장에는 창문이 뚫려있는데, 셋이서 방바닥에 누워 조용히 떠가는 구름도 보았다. 동물과 자연을 통해 알게 되는 인연도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구나 싶었다.
덧. 이 날 이후 솜이는 강아지들 데리고 인왕산 정상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솜이와 아직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임신 초기라서 임신했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약속을 잡자는 요청에 거듭 거절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임신한 걸 털어놓게 되었다. 솜이와는 이때 이후로 연이 계속 닿아서 나와 작업실을 같이 쓰는 사이가 되었다. 작업실에는 안나 작가도 종종 놀러 온다. (참, 급 홍보. 에어비앤비 브런치 페이지에 글을 연재한 허안나 작가의 글을 읽어보세요. https://brunch.co.kr/@airbnb/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