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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Nov 09. 2019

할아버지, 대체 왜 그러시죠

2019. 9. 6(금)

보건소에서 임산부 태그를 받은 지는 꽤 되었지만 착용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지인 중에 아이들을 낳고 성인으로 길러내신 분이 있는데, 우리 때는 그런 게 없었다면서 하고 다니면 좋지 않냐고 몸 고생하지 말고 꼭 가지고 다니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하지만 나는 태그를 눈에 띄게 달고 다니는 것이 아직은 망설여져서 대부분 집에 두고 다닌다고 답했다. 임산부 태그를 달고 다녀도 임신 증상이 눈에 띄지 않는 초기 임산부라 자리 양보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게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표현을 거부당하는 느낌이라 심적으로 꽤 위축되고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또, 지나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요즘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많은지라 임산부인 것을 알고 혹시라도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해서 눈에 띄지 않게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임신 초기보다 몸이 금세 지친다. 하루하루 컨디션이 다르긴 하지만, 점점 다리가 붓거나, 기력이 모자란 날이 늘어서 임산부 태그를 가방에 달고 외출하는 날이 점점 늘고 있다.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임산부 태그를 달고도 (또) 임산부 석에 앉지 못했다. 그 자리에 할아버지가 앉아계셨기 때문이다. 그 할아버지는 할머니랑 같이 지하철을 탔는데 다리 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할머니는 서 계시게 하고, 여유롭게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밉던지. 감사하게도 옆에 서 계시던 또 다른 할머니가 내 임산부 태그를 발견하고는 노부부에게 일어나야 한다고 눈치를 주며 일렀지만, 할아버지를 쉬게 하려는 할머니의 '젊은 사람이니까 참으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임산부 석에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나에게 직접 양해를 구한 것도 아닌 데다 평생 할머니를 저런 식으로 부렸을 것 생각하니 더더욱 얄미웠다. 할머니는 덧붙여, '아까는 젊은 여자가 이 자리에 앉아 있길래 우리가 일어나라고 했다. 그 여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때는 어디에 있었냐'라고 물었다. 어디에 있다가 왜 지금 나타나서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느냐는 걸까...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여성, 남자를 보호하자고 약자인 또 다른 여성에게 참으라고 하는 것도 여성, 다른 여성을 미워하는 것도 여성.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었고... 나는 그 할아버지가 너무 미웠다!



할머니에게는 금방 내릴 거니 그냥 앉아계시라고 했는데 그에 대한 고맙다는 인사는 할머니만 할 뿐, 할아버지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라. 할머니, 생전에 단 한 번이라도, 저 은혜도 모를 남편 말고 할머니를 위해서 사셨으면 좋겠네요.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대체 배가 얼마나 불러야 양보를 받을 수 있을까? 출산 직전에나 가능하려나? 있으나 마나 한 임산부 태그를 달고 다닐 때마다 몸만큼 마음까지도 지치는 느낌이다. 제발 내일은 임산부 석이 비어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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