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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Nov 16. 2019

며느리들은 노예가 아니니까!

2019. 9. 13(금)

시가에서 제사음식 만들기에 동참한 지 올해로 5년 차가 되었다. 시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들은 차린 밥상만 받으시고 부엌일엔 동참하지 않으시기에 이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올해부터는 제사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토토를 통해 시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토토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마꼬가 생기기 한 참 전이었는데, 아이를 가진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를 기르기 어렵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가부장제의 모습을 아이에게 당연하듯 보여주기가 싫었다. 마침 시가에서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주버님의 혼사를 걱정하시는 바, 시어머님이 나에게 좋은 사람(내 친구들을 말씀하셨다...)이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고 수 차례 당부도 하셨었는데, 제사를 지내는 큰 집이라고 하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더라고 말씀드렸었다(사실이다). 아주버님도 제사를 간소화하거나 생략하기를 바라시고. 토토가 부모님과 오랜 기간 동안 대화를 나눴고, 제사 참여에 있어 나의 의사를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점, 부모님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가족 관계를 더 좋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득해 전체 가족회의로 넘어갔고, 고모님들이 힘을 실어주셔서 올 추석부터는 제사를 절에서 모시게 되었다. 



절에서 지내는 제사는 모두가 처음이었다. 스님을 따라서 기도문을 읽고, 절하는 의식을 한 시간 가량 따라 했고, 호명되는 번호 순서대로 미리 준비된 차례상에 절을 올렸다. 우리는 우리의 차례가 올 때까지 두 시간가량 좌식으로 앉아 있었는데, 남자 어른들은 그 시간 동안 좌식으로 앉아 있는 것을 몹시 불편해했다. 하지만 작은 어머님들에게는 추석과 설날 명절 전날에 빠짐없이 모여서 쪼그려 앉아 재료 다듬고, 전 부치고, 밤 깎고 등등의 음식 만들기를 하고, 명절 당일에 제기 꺼내고, 음식 담고, 설거지하고, 상 차리고 치우고, 제기를 다시 닦아서 넣어두고 했던 일련의 노동 과정에 비하면 두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차례를 마치고, 절에서 밥을 준다고 해서 먹고 가려고 했는데, 대체... 절에 계신 보살님들... 거기서 왜 봉사를 하고 계신 건가요. 자기가 먹은 밥그릇은 자기가 닦아야 하는데요... 나는 봉사자분들이 그릇을 대신 닦아주시는 게 너무 싫었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에게 노동을 떠 넘기는 일이 되어버리는 거니까.



그래서 다음부터는 가족끼리 대화도 할 겸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어떨지 의견을 드려보면 좋겠다고 토토랑 논의했다. 그 후로 절에서 헤어졌는데, 다들 이렇게 명절을 보낸 건 처음이라 어색해했다. 몸이 편해서 어색해하다니... 어머니는 일손을 도우시겠다고, 다시 절로 들어가셨지만, 도와드리러 따라가진 않았다. 결혼을 앞두고 석가탄신일에 토토랑 절에 찾아가서 일손을 도와드렸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석가탄신일마다 절에 같이 가자고 하셔서 정중히 거절했다. 거절을 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하긴 했었는데 지금은 내 생각도 바뀌었다. 절에 가서 일하겠다고 하신 건 어머님이 당신 마음이 편하고자 선택하신 일이니까 내가 애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한 번은 시어머니는 아주버님이 결혼하시면 큰 며느리랑도 집에서 제사를 지내봐야 한다며 아쉬워하시길래, 작은 며느리(나)랑 해보셨으니 그걸로 된 거라고, 아주버님 생각하시면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처음에 우리의 이런 의사를 전달하고 나서야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내 기분에는 마꼬가 딸 같아서(아직 우리는 마꼬의 성별을 모르고, 아들이어도 젠더 문제에 신경 쓰겠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시부모님과 조율해나갈 부분들이 많겠지만 계속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며느리들은 시가의 노예가 아니니까! 솔직히 시어머니가 서운한 말을 하실 때마다 미운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도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하니 내가 저항해야 할 대상이 또렷이 보이더라. 그리고 나의 지지자 토토에게 너무 고마웠다. 신혼 초부터 같이 페미니즘 수업도 듣고, 같이 공부해온 게 큰 도움이 되었다. 페미니즘 만만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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