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17(화)
오늘은 볕이 좋아서 느긋하게 산책을 하기로 했다. 오후 느지막이 홍제천을 따라 세검정까지, 포카랑 느릿느릿 걷고 왔다. 저녁 8시쯤 되었을까, 날이 저물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토토의 연락을 받았다. 방금 어머님이 반찬을 가져다주시러 집에서 출발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지금 집에 아무도 없는데... 포카가 있으니 택시를 타고 집에 갈 수도 없고. 토토도 어머님이 오신다는 전화를 받고 바로 퇴근하는 중이라고 했다. 미리 약속도 하지 않고, 갑자기 오신다길래 적잖이 당황했다. 전에는 이런 적이 없으셨는데, 내가 임신했다는 꿈을 꾸시고 갑작스럽게 오셨던 일도 그렇고... 대체 며느리의 임신이 뭐길래. 당황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론 어머님이 무겁게 반찬을 한 가득 짊어지고 버스를 타고 오신다니까 걱정도 되더라.
느릿한 나의 산책은 어쩌다 보니 경보가 되었다. 이것저것 냄새를 맡고 싶다는 포카를 어르고 달래서 헐떡이며 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포카랑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거였더라. 포카를 서둘러 씻기고 밥을 먹인 후, 급히 청소기를 돌렸다. 어머님이 개털이 온 집안에 우수수 떨어진 걸 보신다면 쓴소리를 안 하고 싶어도 안 하실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대략 눈에 보이는 것들 정리하고 나니 토토와 어머님이 함께 도착했다. 어머님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집에 들어오셨다. 거실에 풀어낸 어머님의 가방 안에서는 겉절이 김치, 송이버섯, 더덕, 멸치볶음... 등등 밑반찬이랑 옥수수, 찐빵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주고 싶은 것 주시고는 또 별 말없이 금방 일어나신다.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라고 붙잡아서 마당에서 토토와 어머님이 차를 마시기로 했다. 마당이라고 해봤자 두 세 평 남짓의 작은 공간이지만, 단 둘이 앉아 이야기 하기에는 나름 괜찮다. 아들과 엄마 단둘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도록 하고, 나는 냉장고에 밑반찬을 넣고 있었는데 밖에서 토토가 어머님에게 뭐라고 소곤소곤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토토가 아들 집이어도 오늘처럼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시면 안 된다고 일렀다고 한다.
임신 소식을 시가에 전하기로 했던 날, 나는 함께 가지 않고 토토만 보냈었다. 가서 직접 말씀드리고 오라고 하고 나는 일을 하러 갔다. 시가 어르신들의 제스처를 직접 보기가 쑥스럽고, 부담스러워서 그랬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머님은 임신 소식을 듣고 우셨다고 했다. 할머니가 되는 일을 그동안 꽤 기다리셨던 모양이다.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일까, 아직은 손주를 바라는 어머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진 못하겠다. 그런데 이제 첫 손주가 생긴다니 그 기분 좋은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불쑥 얼굴을 보러 오신 게 아닐까. 손주를 바라는 마음보다 오히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마음이 더 이해가 되더라. 기분이 너무 좋고, 기쁠 땐 그냥 저질러 버리고 싶은, 혹은 저질러 버리는 일들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 어머님의 기분 좋은 일탈(?)은 아들네 집에 반찬을 가져다주는 일일 뿐이었던 거지만. 어머님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해 주거나 사 줄 테니 언제든지 이야기하라고 하셨다. 토토가 이럴 때는 좀 부럽다. 어머님이 순하신 분이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꼬도 어머님의 이런 면을 닮았을까. 그래서 입덧도 없이, 고생시키지 않고, 조용히 잘 자라고 있는 게 아닐지. 이제는 가족들을 보며 마꼬는 어떤 면을 가지고 태어나게 될지 혼자 짐작해보게 된다. '저 근데요, 어머님... 제 얼굴을 본다고 손주를 빨리 만날 수 있는 게 아닌데요' 하고 하고 싶었던 말은 마음속으로 삼켰다. 어머님은 가방만큼 마음도 한결 가벼운 얼굴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