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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Jan 10. 2020

양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9. 10. 26(토)

평소에 몸매가 드러나지 않으며 호주머니가 달린, 넉넉한 스타일의 원피스를 즐겨 입는 편이다. 편하기도 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기도 해서 비슷한 스타일의 옷들을 파는 두어 군데의 로드숍을 정해놓고 그곳에서만 옷을 구입해 입는다. 몇 해 전, 토토랑 장을 보러 가던 날에도 나는 그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연한 에메랄드 컬러에 목에는 둥근 카라가 달린, 길이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일자형 원피스였다. 우리는 버스에 탔는데 빈자리가 없어서 뒷문 쪽에 섰고, 마침 2인석에 앉아계셨던 한 아저씨가 일어나셔서 나는 별생각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 줄만 알았던 아저씨는 1인석 쪽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서서 가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분께 임부복 차림으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리를 양보해주신 아저씨께 임산부가 아니었음을 설명드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양보해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드릴 수도 없고... 그저 마음속으로 감사히 여기며 몸 편히 장을 보러 갔던 기억이 있다. 



신혼 초에 겪었던 그 일은 돌이켜보면 웃음이 나는 해프닝이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 진짜 임산부가 되어보니 그 경험이 얼마나 보기 드물고 감사한 일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임산부석이 비어있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한 번은 지하철에서 임산부석을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말을 들은 후로(<할아버지, 대체 왜 그러시죠> 편 https://brunch.co.kr/@nariplanet/41) 임산부석에 마음 편히 앉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마음속에서 고이 접어두었다. 임산부 석 앞에 임산부 태그를 달고 서 있어도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남성이나 고령의 여성분들이 임산부석에 앉아 있을 때에는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거부당한 느낌이라 마음이 썩 좋진 않았다. 임산부 석이 비어 있는 곳을 찾아 지하철의 여러 칸을 걸어본 적도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임산부석을 살피지 않고 문 앞에 서서 가는 날이 늘었다. 어차피 도움받지 못할 바에야 마음의 상처라도 받지 말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오늘 트위터에서 용기를 얻는 글을 하나 보았다.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임산부 석에 버티고 앉아 이죽거리는 한 남성에게 "지 꼬추가 무거우면 뱃속의 아기보다 무겁겠냐"라고 하신 할머님 올해의 명언상 드려야 함.


한 할머님이 지하철에서 말씀하신 걸 누군가 SNS에 적었고, 그 글을 본 한 트위터리안의 글이 내 타임라인에 흘러들어 온 모양이었다. 입담 있는 할머님의 말에 웃음과 함께 용기가 났다. 그래, 내 몸이 더 무겁지. 나는 도움받아 마땅한 상태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그럼에도 거절(이라고 생각했던)의 경험이 있기에 선뜻 양보를 부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임신 초기에 해코지를 당할까 봐 임산부 태그를 빼고 다녔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여러 가지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사람마다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양보해주기 어렵다고 하면 상처 받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보자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오늘은 일 때문에 몇 차례 장소를 이동해야 했던 날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묵직한 노트북 가방 때문에 걸음도 느려지고, 양다리는 오븐에서 구워지는 빵처럼 점점 부어올랐다. 이제는 지하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할 때에도 제법 숨이 찬다. 오늘만큼은 빈자리가 있기를 바랐는데 임산부석은 언제나처럼 만석. 마침 임산부석에 앉아있는 한 남성분이 보였다. 부탁을 해볼까, 잘 말할 수 있을까... 우물쭈물하던 차에 할머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말해보았다. "저 임산부인데요, 자리 좀..." 우려했던 것과 달리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분은 나의 임산부 태그를 보고 양보를 해주었다. 



기뻤다. 처음으로 부탁해 양보를 받은 날이었다. 용기를 내서 얻은 오늘의 기쁨이 오래오래 갈 것 같았다. 더불어 수많은 트위터리안들에게 명언을 남겨주신 할머님과 임산부석에서 양보를 해주신 그분에게 행복한 일이 생기길 바랐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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