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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튜디오 포카 Feb 06. 2020

진부하고 고리타분 하지만

2019. 11. 22(금)

일하러 가는 길에 점심 식사를 하러 '리치몬드 제과점'에 들렸다. 싱싱한 양상추가 아삭하게 씹히는 샌드위치가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리치몬드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빵집이라 그런지, 빵을 좋아하는 어르신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매장에 중년층이 많은 편이다. 연휴에는 삼대로 보이는 가족들이 브런치를 먹으러 오는 테이블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나는 포카가 주기적으로 다니는 동물병원이 이 리치몬드 빵집과 가까워서, 진료를 받으러 이 동네에 올 때마다 빵을 한아름씩 사가곤 했다.



매장에서 먹고 가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데스크에서 결제하고 주문을 넣었는데 진동벨을 따로 주시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언제 주문한 메뉴로 호명될지를 한참동안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직원분이 빵과 음료를 식기에 정성껏 담아 직접 가져다주시더라. '맞아. 옛날에는 셀프가 아니라 다 이렇게 가져다주셨었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방식이었는데, 대접받는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다. 적당히 폭신한 올리브 포카치아 빵 사이에 들어간 신선한 토마토와 양상추, 햄의 조화를 음미하며 매장에서 직접 갈은 토마토 주스랑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남은 2019년의 스케줄을 가늠해보았다. 보름 뒤에 그룹 전시를 열 예정인데 전시 설치까지 시간이 빠듯하다. 넉넉치 않은 일정이지만, 예전처럼 일에만 몰두하는 방식으로 작업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체력 때문에 주중에 하루 이틀쯤은 쉬어야 하는 스케줄도 넣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어느 정도 욕심을 버리고 '반쯤 포기한 상태'와 '어떻게든 되겠지'의 마음가짐을 가지기로 했다. 하루하루 착실히 보낸다면,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마치 월간 이슬아의 이슬아 작가님이 '미래의 슬아, 미슬이'를 믿는 것처럼 나도 '미나리'를 믿어볼까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마음이 조급 해지는, 일하는 요령이 부족한 사람이라서 간혹 공동작업을 할 때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대체로 혼자 끙끙 앓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마음을 느슨하게 먹지 않으면 내가 지칠 것 같다. 이제는 막 해보기로 한다. 다행히 남은 일은 개인작업이라 혼자 책임지면 되는 일이니, 부족하더라도 비난 받을 일이 없단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또 다른 다행인 점은 함께 일하는 팀에 나의 상황을 이해해주시는 작가 선생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오늘도 늦게까지 나 혼자 끝냈어야 하는 일을 함께 남아서 도와주셨다. 두 아이를 낳고 성인이 될 때까지 기르신 경험이 있는 분이라 나의 몸 상태와 상황을 이해해주시는 것 같다. 마꼬 소식을 선생님께 알렸을 때 선생님은 당신 일처럼 크게 기뻐해 주셨다. 사실 임신에 대한 고민이 없었을 때에는, 이런 반응들이 진부해 보이던 때도 있었다. 아니,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치며 사는 삶 자체에 진부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이제는 그것 외에 또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까 싶다. 다소 불편하고, 고리타분해 보여도 오랜 빵집이 고수한 방식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처럼 그저 감사한 마음이 인다. 



나도 미래의 나에게 임신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거에 고리타분하다고 여겼던 방식대로 기뻐할 것이다. 아직은 그것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감사한 마음을 많이 받았고, 또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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