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물에 잠겨도 토마토만 있다면
명작, 수작은 바라지도 않는다. 범작 되기도 참 힘들다. 괴작이라면 차라리 나을까. 나중에 시대를 잘 만나 '떡상'할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망작(망한 작품)이라면 어찌해야 하나.
여기 망작이 있다. 1995년 개봉해 철저히 망했다고 알려진 작품이다. 바로 <워터월드>다.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케빈 코스트너)를 캐스팅해, 최대 제작비를 들여 영화를 제작했지만 극장 흥행 수익은 예상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다행히 해외에서 어느 정도 흥행을 했고, 2차 수익(비디오, 케이블 판권 등)도 꽤나 쏠쏠해서 손익분기점을 맞췄다고 알려졌다. 그러니 망한 게 아니라 수익을 낸 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미국 극장 흥행 참패의 충격이 워낙 커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망한 영화로 인구에 회자되는 비운의 영화이기도 하다. 나중에 잘린 40여분을 복원한 감독판 DVD가 나오고 나서 작품도 괜찮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역시나 여전히 지루하고 연기도 별 볼일 없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래도 약 20여 년이 흐르며 명예회복을 조금 하기는 했으니 다행이다. 슬프게도 케빈 코스트너는 <워터월드> 이후로 내리막길을 걸으며 한물간 배우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그래도 꾸준히 활동하며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기후 변화로 세계가 물에 잠겨버린 지구이다. 살아남은 인류는 망망대해에서 무리를 이루거나 홀로 떠다니며 약탈과 방어에 힘쓰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주인공 마리너(케빈 코스트너)는 귀 뒤에 아가미가, 발가락 사이에는 물갈퀴가 생긴 돌연변이 인간이다. 돌연변이 인간은 죽임까지 당하므로 주인공은 철저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살아간다(귀 뒤와 발가락이라 자세히 보는 사람도 없지만). 사람들은 지구 어딘가 물에 잠기지 않은 '드라이랜드'가 있다고 믿고 있다. 등에 드라이랜드의 지도가 새겨져 있다고 소문이 난 소녀(이놀라)와 그녀의 (양)엄마와 마리너, 소녀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킨 악당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당연히 할리우드 상업 영화답게 마리너 일행은 악당을 물리치고 드라이랜드에 도착한다. 감독판에 따르면 드라이랜드는 에베레스트산이라고 한다.
물로 가득 찬 지구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미래의 지구인들에게 돈 따위는 필요 없다. 그들은 주로 물물거래를 하는데 흙은 누구나 탐내는 귀한 물건이 된다. 마른 흙이 금보다 귀한 대접을 받게 되고, 한 잔의 맑은 물은 최고급 양주보다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그러니 흙에서 자라는 식물은 어떠하겠는가. 드라이랜드에 도착하기 전에 영화 속에는 딱 2종류의 식물이 등장한다. 라임나무와 토마토이다. <인터스텔라>에 옥수수가 있다면 <워터월드>에는 토마토가 있다.
토마토는 건강식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긴 채소나 과일 중에 건강에 해로운 건 별로 없겠지만(당뇨병 등을 앓는 환자에게 안 좋은 과일이 있긴 하지만) 토마토는 속담에도 들어갈 만큼 유용성이 입증되었다. '토마토가 빨갛게 익을수록 의사는 얼굴이 퍼렇게 질린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고 한다. 토마토는 비타민도 풍부하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포만감이 있다. 즙이 많아서 차갑게 먹으면 아주 시원하다. 라임도 토마토도 비타민C가 풍부하다. 대항해시대 괴혈병(비타민 C 섭취 부족으로 생기는 병)으로 수많은 뱃사람과 해군 장병들이 사망했던 유럽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워터월드에 라임과 토마토가 등장하는 게 의미심장해 보인다.
<워터월드> 속 토마토는 일반 토마토이겠지만 여기에서는 방울토마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는 토마토를 재배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방울토마토는 여러 해 재배해보았다. 누군가 텃밭에 심을 작물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꼭 방울토마토를 이야기해준다. 구하기도 쉽고 키우기도 쉽다. 토마토와 방울토마토는 재배방법에 별 차이는 없다. 대신 토마토의 열매가 더 크기 때문에 지주대에 더 신경 써야 한다.
냉해를 입지 않으려면 중부지방의 경우 입하(5월 5일) 이후에 모종을 심으면 좋다. 씨앗을 심어서 키워도 되지만 모종이 흔하니 안전하고 편하게 모종으로 심는 게 더 좋다. 그냥 방울토마토보다는 대추 방울토마토가 더 맛있다. 열매가 달리면 휘청휘청하기 때문에 모종을 심을 때 지주대를 같이 박아준다. 방울토마토는 늦가을까지 계속 열매가 달리기 때문에 키가 계속 커진다. 지주대는 밑에 박히는 부분 생각해서 150cm 이상의 긴 것으로 박는 게 좋다. 너무 커지면 관리가 힘들기 때문에 적당한 때에 원 줄기를 잘라서(순지르기/적심) 더 자라지 않게 해 준다.
방울토마토를 키울 때 제일 성가신 점은 곁순 제거다. 줄기와 잎 사이에 새로 줄기가 비쭉 나오는데 이 걸 없애야 원 줄기에 달리는 열매가 튼실해진다. 곁순은 금방 자라고 또 금방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때문에 나중에 깜박하다가는 아까워서 못 자르는 경우가 생긴다. 게다가 여기저기 열매가 달리면 당연히 영양분 경쟁이 일어나고 식물 자체가 무거워지기 때문에 곁순은 제거해주는 게 좋다. 곁순은 정말 금방 자라기 때문에 매일 보면서 따주어야 한다. 초보들이 가장 힘든 점이 바로 곁순 따기다. 책으로 보거나 말로 설명을 들으면 도대체 뭐가 곁순인지 모르기 때문에 영상을 보거나 경험자와 같이 곁순 따기를 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나 역시 멋모르고 방울토마토에 손을 댔다가 곁순은 잘 땄지만 잎을 마구잡이로 쳐내 방울토마토가 앙상해졌던 경험이 있었다(죽지는 않았다). 방울토마토는 줄기에서 뿌리가 잘 나온다. 그래서 곁순을 키워서 잘라 땅에 심으면 잘 자란다. 모종을 심을 때 좀 깊게 심는 게 좋다. 어차피 줄기에서 뿌리가 나오고, 깊게 심으면 바람에 덜 흔들리기 때문이다.
물관리도 중요한데 장마철이 문제다. 땡볕을 받으며 잘 자라던 토마토들이 갑자기 물을 잔뜩 먹으면 열매껍질이 터진다. 이를 어려운 말로 '열과'라고 한다. 장마는 우리가 손 쓸 도리가 없으니 이때만큼은 버리는 열매도 상당하다. 땅에 떨어진 열매를 그냥 두면 내년 봄에 싹이 나는 걸 볼 수 있다. 그만큼 생명력도 강하다.
같은 가지과의 고추가 각종 병해충에 시달리는데 반해 방울토마토는 별다른 병해충이 없다. 대신 칼슘이 부족하면 배꼽썩음병이 생기니 비료를 줄 때 석회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전에 쌈채소는 든든함을 책임지는 텃밭의 채소라고 했는데 방울토마토 역시 초보 농부에게 흐뭇함을 안겨주는 작물이다. 잘 자라고, 쌈채소와 달리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걸 보면 잠시 세상의 온갖 시름이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내가 농사에 소질이 있나 하는 착각도 덤으로 따라오니 조심하자. 방울토마토는 키우기는 쉽지만 열매를 맛있게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나는 여러 번 방울토마토를 키웠는데 열매는 맛이 없었다. 시거나 맹맹했다. 마트에서 사는 방울토마토도 맛있는 것 없는 것 섞여있지만 직접 재배한 방울토마토는 대부분 맛이 없었다. 나만 그런가?
올해는 모종을 심고 난 이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모종이 잘 자랄지 모르겠다. 텃밭에 안 나가본지 일주일이나 되었고 이번에는 일자 지지대가 아닌 X자 지지대를 설치해서 개별 지주대가 없다 보니 유난히 바람이 강한 올해 더 바람을 타게 되었다. 이번 주에 유인줄을 달아줄 생각이다. 열매가 많이 달리면 일자 지지대 하나로는 좀 버거워서 올해는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텃밭의 즐거움 중 하나는 다양한 시도다. x자 지지대야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서 특별하지도 않지만 내게는 처음이라 좀 설렌다.
토마토 잎은 소량의 솔라닌이 있어 먹지 말라고 하는데 찾아보니 토마토 곁순으로 나물을 무쳐먹는 사람이 있었다(주석 1). 데치고 소금, 깨소금, 참기름을 넣어 무치니 담백하고 고소하다고 한다. 워터월드에도 마리너가 토마토 잎을 우적우적 씹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돌연변이라 좀 다른가. 아무튼 잎을 생으로 먹지는 말자. 나중에 등장한 토마토 나무는 잎도 열매도 없이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다. 마리너가 이놀라와 엄마에게는 주지도 않고 혼자 다 먹어치웠다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주인이니까 뭐....
영화 속 식물은 초반에 잠깐 등장했다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마리너의 배가 불태워지기 전에 없어졌는지 불태워지면서 없어졌는지 그 시기를 알 수 없다. 꾀죄죄하고 소금기 가득하고 비린내 나고 물때 가득한 바다 생활에서 라임과 토마토는 얼마나 상큼할까. 영화 초반, 그런 귀중한 라임을 도둑맞자 마리너는 도둑에게 복수를 한다. 라임을 훔친 죄로 도둑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한창훈의 글과, 얀 마텔의 소설 <라이프 오브 파이>와 스티븐 캘러핸의 <표류>를 좋아한다.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당연히 이 세 작품에는 라임이나 토마토 같은 육지의 식물보다는 바다 생물들이 더 많이 나온다. 세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바다 생물, 특히 회를 먹고 싶다는 갈망이 마구 일어나는데 다음에 또 그런 갈증이 솟아난다면 토마토도 같이 사서 함께 먹어볼까 한다. 그렇게 알뜰살뜰 비타민 C를 챙겨가며 혹시 미래에 닥칠지 모를 바다 생활을 준비해야겠다. 비타민 C 챙기기보다 수영을 먼저 배워야겠지만.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