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계획과 명분이 다 있구나
미덕을 권장하려 애쓰는 국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맨 먼저 아테네의 폴리스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간통에 돌을 던지고,
의무적으로 부르카(몸 전체를 가리는 이슬람 여성 복식-옮긴이)를 입게 하고,
세일럼에서 마녀사냥을 하는 등,
과거와 오늘날의 종교적 근본주의를 떠올린다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정의란 무엇인가> 302p
왕족 출신이고, 머리도 똑똑하고, 인물도 빠지지 않고, 엄격한 수행을 12년이나 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사람 다루는데도 능숙한 데바닷다는 자기가 부처님과 비슷하다는 발칙한 생각에 사로잡혀 대망의 결론을 내린다.
“그대는 미친 사람이요, 죽은 사람이요, 남의 침이나 받아먹고사는 사람이다.”
이 말 자체도 아프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굴욕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더 상한 우리의 비뚤어진 데바닷다는 더더욱 비뚤어지게 되었다. 복수의 칼을 갈며 빅픽쳐를 그린 데바닷다는 하나씩 계획을 실행해 나간다. 그는 마가다국의 왕자 아자타삿투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도록 부추기고, 자신에 동조할 사람들을 모았다. 뒷배가 든든해지자 데바닷다는 다시 부처님께 나아가 나태에 빠진 교단을 개혁해야 한다며 다섯 가지 법을 주장한다.
문헌에 따라 오법의 내용은 조금씩 다른데 <사분율(권4)>에 기록된 내용은 이렇다
첫째, 걸식한다.
둘째, 누더기 옷을 입는다.
셋째, 길 위에 앉는다.
넷째, 버터와 소금을 먹지 않는다.
다섯째, 생선을 먹지 않는다.
코끼리에 술을 먹여 부처님께 덤벼들게 만들었고(날뛰던 코끼리는 부처님의 말 한마디에 바로 조용해졌다), 산 위에서 돌을 굴러 떨어뜨려 부처님을 해치려 했으며, 자신의 손톱 밑에 독을 달라 부처님을 공격하려 하였다. 여기에 더해 청부살인을 하려 했다는 기록도 있다. 데바닷다의 모든 시도는 실패하였고, 오히려 손톱 밑에 발랐던 독이 퍼져 자기가 죽게 되었다. 그는 아비지옥으로 직행하였다.
데바닷다는 무협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악당을 떠올리게 한다. 능력은 있지만 냉정하고 차가운 제자가(게다가 잘생긴!) 스승님을 제치고 새로운 리더가 되어 권력과 재물을 탐하지만 스승님의 진정한 수제자(천신만고 끝에 각성한)가 나타나자 몰락한다는 클리셰한 이야기에 나오는 나쁜 제자와 비슷하지 않은가. 데바닷다도 나쁜 제자도 자기 과신의 덫에 빠져들어 끝까지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한다. 오직 직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진! 파멸하는 그 순간까지도 욕망에 붙들려 이글이글 불타는 악당들은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짠해지기도 한다. 그 수고로움이 결국 무위에 그칠 걸 모르고 날뛰는 악당이 때로 애처로워 보일 때도 있다.
불교는 무아를 말한다. 데바닷다는 12년을 수행했어도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잘난 자기 자신에 집착하여 자기가 만든 감정에 휩쓸려버렸다. 들끓는 욕망, 맹렬한 증오심, 격정의 심연은 결국 그를 삼켜버렸다.
데바닷다가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주장대로 오법을 지키며 죽는 날까지 고행을 하며 살았을까 아니면 절대권력에 취한 사이비 교주처럼 명성과 재산을 독차지하고 호의호식했을까. 데바닷다는 지옥으로 떠났지만 그의 교단은 오법을 지키며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5세기 인도를 방문한 법현스님은 '데바닷다의 무리가 있었는데 항상 과거 삼불에게 공양하였으나 오직 석가문불釋迦文佛(석가모니 부처님)에게는 공양하지 않았다고' <불국기>에 기록하였다.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데바닷다처럼 그 교단도 뒤끝 뚝심은 알아줘야 한다. 7세기에 인도를 간 현장스님과 의정스님 역시 데바닷다 교단을 보았으며, 이들의 의식과 교리가 불교와 다름이 없다고 기록하였다. 데바닷다 교단은 불교와 거의 같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인 듯 불교 아닌 듯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훗날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면서 데바닷다 교단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 지옥의 데바닷다는 어떻게 생각하려나(<법화경>에 의하면 데바닷다는 지옥에서 정해진 형기를 다 채우고 결국 부처가 된다고 한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꽃이나 열매 아니냐고 묻는데 저건 충영蟲癭, 그러니까 벌레집(벌레혹)이다. 저 안에 곤충이 살고 있다. 벌목-혹벌과의 아주 작은 곤충인 밤나무혹벌이 주인공. 학명은 Dryocosmus kuriphilus Yasumatsu, 성충은 크기가 3mm밖에 안된다(사진 5 참조).
성충은 크기도 작은데 성충으로 지내는 기간도 짧아 겨우 4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여름에 충영을 뚫고 나온 성충은 부지런히 짝짓기를 하고 다시 밤나무 눈(줄기, 잎, 꽃이 되는 부분)에 알을 낳은 후 장렬히 죽는다.
알은 0.2mm 정도로 작아서 맨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30여 일 뒤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는 거의 자라지 않는 상태로 이듬해 봄까지 겨울눈 속에서 버티는데 3월부터 비로소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다.
애벌레가 커지면서 충영 역시 4월부터 눈에 띄게 커지고 붉어져 밤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발견하기 쉬워진다. 충영 속에서 밤나무의 양분을 훔쳐먹으며 자란 밤나무혹벌은 6월 즈음에 번데기가 되었다가 성충이 되어 7월에 충영 뚫고 나와 자신의 어미가 그랬듯 맹렬히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고 죽는다.
꽃 같기도 하고 열매 같기도 한 작고 예쁜 충영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밤나무 가지가 자라지 못하여 꽃도 못 피고, 열매(그러니까 밤)도 맺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어도 크기가 작아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충영은 성충이 탈출한 이후 말라버린다. 충영의 피해를 몇 년간 입다 보면 가지가 말라버리거나 아예 나무 전체가 고사하는 경우도 많다. 겨울에 산행을 하다 보면 나무 가지에 정체불명의 동그란 무언가를 여기저기 달고 있는 나무를 보게 되는데 밤나무나 참나무일 가능성이 크다. 겨울이 되어 잎이 떨어지면 말라비틀어진 충영이 더 잘 보인다.
밤나무혹벌은 우리나라에서만 골칫거리가 아니다. 1941년 일본에서 처음 확인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59년 경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처음 발견되어 신종으로 발표되었는데(그래서 학명에 Yasumatsu 가 들어있다) 나중에 중국이 원산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도 우리나라도 요 자그마한 곤충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는데(우리나라의 경우 재래종 밤나무가 거의 전멸했다고) 밤나무혹벌에 견디는 내충성 품종(내충성 품종의 눈 속 있던 애벌레는 겨울을 지내는 동안 다 죽는다)을 재배하고, 밤나무혹벌의 천적(대표적으로 중국긴꼬리좀벌)을 이용하여 효과를 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밤나무혹벌은 밤 농가를 떨게 하는 제1의 원흉으로 여겨지고 있다.
2021년 뉴스에 따르면 충남 부여군 전체 밤 재배면적의 42%가 혹벌 피해를 봤다고 한다(각주 1). 혹벌 알과 애벌레는 나무 눈 속에 꽁꽁 숨어있기 때문에 농약을 쳐도 없애기가 힘들다고. 1978년부터 믿었던 내충성 품종들에도 혹벌이 생기고 있고, 피해 지역도 넓어져서 앞으로의 밤 농사가 어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대사처럼 언젠가 답을 찾겠지만은 그때까지 밤나무혹벌은 골칫거리가 아닌 재앙으로 군림할 수도 있다. 군밤, 밤식빵, 바밤바가 이제는 볼 수 없는, 라떼의 간식으로 남지 않아야 할 텐데...
데바닷다도 밤나무혹벌도 악당이라 부르면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다. 그분의 기분은 일단 제쳐두고, '기분이 태도가 된' 데바닷다가 악당인 건 확실하다. 부처님을 살해하려던 시도는 실패에 그쳤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살해는 성공하기도 했다. <파승사(권 10>에는 연화색 비구니를 때렸고 이로 인해 연화색 비구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으며, <증일아함경(권 47)>에는 자기에게 충고한 법시 비구니를 때려서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행위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 없다.
이번에는 밤나무혹벌. 밤나무를 죽게 만드는 밤나무혹벌은 나쁜 곤충인가? 요건 좀 애매하다. 익충이니 해충이니 하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 일뿐, 자연의 입장에서는 익충도 해충도 없다. 생명체들은 서로 먹고 먹히면서 먹이사슬을 이룬다. 여기에 좋다 나쁘다는 도덕적 판단이 들어설 틈은 없다. 밤나무혹벌은 밤나무에게는 악당이지만 긴꼬리좀벌에게는 맛난 먹잇감이다. 인간들이 '밤나무혹벌! 너는 악당이야.'라고 비난한다면 밤나무혹벌은 금자씨 마냥 '인간! 너나 잘하세요.' 하며 되받아치지 않을까.
요즘 E채널의 <용감한 형사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 하나. 악당들은 하나같이 계획과 명분이 있다. 나쁜 짓을 벌이고 나서 붙잡힌 후에야 나름의 정당함(전부다 피해자 탓을 한다)과 어쩔 수 없음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 기가 찬다. 그깟 명분 깊숙이 넣어 두고서 제발 가만히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의 명분이란 바스러지기 쉬운 한없이 연약한 것이어서 보고 또 보고, 판단하고 또 판단해야 하지만 아무리 신중한 명분과 잣대라 하더라도 자연을 재단하면 안 된다. 자연의 악당은 악당이 아닐 수 있으니까.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의 악당일 수 있으니까.
1. 서륜, "이 작은 혹벌에... 밤농가 벌벌," 농민신문, 2021년 7월 3일 수정, https://www.nongmin.com/article/20210702340974
2. 불광미디어, "자현스님이 들려주는 불교사 100장면 - 붓다의 탄생," 네이버포스트, 2018년 11월 12일,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17080410&memberNo=3877558
3. 법상스님, "법상 스님의 사찰에서 만나는 벽화 - 부처님을 해치려는 제바달다" 제주불교, 2021년 2월 24일
http://www.jeju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800
4. 왕바다리, "밤나무혹벌(밤나무순혹벌) 충영," 왕바다리의 생태정원(블로그), 2016년 5월 12일,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prothneyi&logNo=220706051679
5. 서륜, "이 작은 혹벌에... 밤농가 벌벌," 농민신문, 2021년 7월 3일 수정, https://www.nongmin.com/article/20210702340974
6. 농사로, "Dryocosmus kuriphilus 밤나무혹벌," 2024년 1월 15일 접속, https://www.nongsaro.go.kr/portal/ps/psw/pswa/pswaa/clgruppDtl.ps?menuId=PS03768&sortField=&sortOrder=&pageIndex=1&pageSize=3&sNckEsntlNo=&sFmlEsntlNo=&sSpcsEsntlNo=ZT1AY0005&sSampleSeqNo=&sDoCode=&sSigun=&sDoCodeNm=&sSigunNm=&sGubun=hlsctCropDtl&sPlntSeCode=349002&sPlntEsntlNo=7107&srchType=1&sType=349002&sText=&sSrchText=&sSrchType=&sStrType=
1. 농사로. "Dryocosmus kuriphilus 밤나무혹벌." 2024년 1월 15일 접속. https://www.nongsaro.go.kr/portal/ps/psw/pswa/pswaa/eclgyInfoDtl.ps;jsessionid=XiidxJpxmu35vN2yeFbdBKsfrTqXLEXhyxUdihNykHnZtMwgxV6x7DRsLYo0Sa7D.nongsaro-web_servlet_engine1?menuId=PS03768&sortField=&sortOrder=&pageIndex=1&pageSize=3&sNckEsntlNo=&sFmlEsntlNo=&sSpcsEsntlNo=ZT1AY0005&sDoCode=&sSigun=&sDoCodeNm=&sSigunNm=&sGubun=hlsctCropDtl&sPlntSeCode=349002&sPlntEsntlNo=7107&srchType=1&sType=349002&sText=&sSrchText=&sSrchType=&sStrType=
2.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이창신 역. 서울:김영사, 2010.
3. 란지푸, 데바닷다 그는 정말 악인이었는가. 원필성 역. 서울:운주사, 2004.
4. 김종국. "밤나무혹벌과 천적." 수목보호 no.3 (1997): 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