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영 May 18. 2023

4월, 밤나무혹벌과 데바닷다

너는 계획과 명분이 다 있구나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책장 구석에 처박혀서 잊히고 있던 책을 꺼냈다. 이번 글의 주인공은 악당. 갑자기 '악당은 왜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이어 '악당이 없는 세상은 과연 살기 좋을까'라는 생각이 이어지면서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덕을 권장하려 애쓰는 국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맨 먼저 아테네의 폴리스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간통에 돌을 던지고,
의무적으로 부르카(몸 전체를 가리는 이슬람 여성 복식-옮긴이)를 입게 하고,
 세일럼에서 마녀사냥을 하는 등,
과거와 오늘날의 종교적 근본주의를 떠올린다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정의란 무엇인가> 302p


 도덕과 가장 가까운 개념을 들라고 하면 종교가 먼저 생각난다. 도덕도 종교도 옳음이라는 기준이 꽤나 선명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문제가 되었는데 역사에는 도덕적 or 종교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흩뿌린 피의 얼룩이 곳곳에 남아있다. 과거에 비해 지금은 그 기준이 넓고 느슨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도덕적, 종교적 잣대는 엄중하다. 도덕과 종교는 말한다. 제멋대로 구는 악당과 악당 때문에 망가진 사회를 보라고. 너무너무 무섭지 않냐고. 아이러니하게도 도덕과 종교는 두려움을 영양분 삼아 싹을 틔우고, 두려움의 부채질을 받아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 악당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오히려 도덕과 종교일지도 모르겠다.

 

 평화라 종교라 일컫는(평화와 거리가 멀 때도 종종 있었지만) 불교에도 악당이 있을까? 있다. 그런데 불교의 악당은 좀 독특하다. 신을 믿는 타 종교와 신을 믿지 않는 불교의 태생적 차이 때문인지 불교의 악당은 인간적이어도 너무 인간적이다. 타 종교의 악당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입을 다물고 이제 불교의 악당, 데바닷다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사진 1.  코끼리를 조복시킨 부처님(출처: wellcome collection)



 산스크리트어로는 Devadatta. 이를 한문으로 번역한 이름으로는 제바달다提婆達多, 제바달도提婆達兜, 지바달도地婆達兜, 제바달도諦婆達兜 등이 있는데, 간단하게 조달調達이라 하기도 한다( '조달'에서 '쪼다'라는 말이 파생됐다는 썰도 있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옛 경전에서는 천수天授라 번역하기도 했다. 가장 많이 쓰이는 표기는 데바닷다(데바닷타), 제바달다이다. 이 글에서는 데바닷다로 하겠다.


 데바닷다는 나름 성골이었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다. 사자협왕師子頰王에게는 네 명이 아들이 있었다. 순서대로 정반왕淨飯王, 백반왕白飯王, 곡반왕斛飯王, 감로반왕甘露飯王인데 부처님은 큰 아들 정반왕의 아들이고(아래 표에서 '실달다'라고 표기되어 있음), 데바닷다는 막내 감로반왕의 아들이다. 데바닷다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동생이 그 유명한 아난이다(불교계에서만 유명하지만). 아난은 부처님의 시자侍者(귀한 사람을 모시고 시중드는 사람)로 부처님의 법문을 가장 많이 들은 인물이고, 불교 경전의 서두를 장식하는 '여시아문如是我聞(내가 이렇게 들었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난이 없었다면 불교 경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



사진 2. 부처님의 가계도(출처: 자현스님이 들려주는 불교사 100장면)




 그러니까 부처님의 최측근과 부처님을 죽이려 했던 악당은 형제이고, 극과 극의 형제와 부처님은 사촌지간이라는 말이다.


 초기 경전에서는 데바닷다를 부정적으로 그리는데 무려 전생에서부터 주야장천 부처님과 악연이었다고 설명한다. 숱한 전생 이야기에서(부처님의 전생을 다룬 경전 <자타카> 에는 547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두 사람의 역할은 고정되어 있다. 예상하다시피 데바닷다는 가해자로, 부처님은 피해자로 등장하며, 예상하다시피 부처님은 절대 원망하지 않고 인내하며 불리한 상황을 받아들이며(설령 그 끝이 죽음일지라도), 예상하다시피 데바닷다는 좋지 않게 생을 마감하며, 예상하다시피 둘은 또 다음 생에 만난다. 부처님과 데바닷다는 수많은 생을 거치며 다른 모습으로 만나지만 참으로 일관성 있게 만나니 희대의 환장의 짝꿍이라 해도 되리라.

 

 이번 생으로 돌아와서... 집 나간 태자가 부처님이 되어 돌아오자 석가족(부처님의 종족) 사이에서는 출가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데바닷다도 그 흐름을 따라 출가한다. 그는 12년간 열심히 수행했다. 그랬건만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신통력도 부리지 못하자 비뚤어지기 시작한다. 데바닷다는 원래 자존심이 강한 인물인데 잘난 자신이 남들 다하는 깨달음과 신통력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척 쪽팔렸을 것이다. 깨달음의 하이패스를 타고 싶었던 그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부처님께 가서 신통력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하고(여기에 더해 잔소리까지 듣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가서 부탁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찾아간 사람은 동생 아난이었다. 깨닫지 못한 상태였던 아난은 형의 욕망과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처님께 들은 신통 부리는 법을 술술술 알려준다. 데바닷다는 그 방법으로 수행해 얼마 안 있어 신통을 자유자재로 부리게 되었다. 신통력을 마스터한 데바닷다의 머리에 한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부처님보다 못한 게 뭐가 있지?"


 왕족 출신이고, 머리도 똑똑하고, 인물도 빠지지 않고, 엄격한 수행을 12년이나 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사람 다루는데도 능숙한 데바닷다는 자기가 부처님과 비슷하다는 발칙한 생각에 사로잡혀 대망의 결론을 내린다.


"잘난 내가 불교 교단을 접수해야겠다."


 참지 않는 데바닷다는 부처님께 가서 "이제 연세가 많아 교단을 이끌기에 힘드실 테니 물러나시고 제게 교단을 물려주십시오."라고 요구, 아니 통보(a.k.a 정중한 협박)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부처님께서 "그래, 알겠다. 옛다." 하시면서 순순히 자리를 내어줄 거라 예상했을까. 경전을 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처님께서는 부드러운 말로 차근차근 말씀하시는데 유일하게 이때를 묘사한 장면에서는 부처님답지 않은 거칠고, 뾰족한 말씀이 나온다.


“그대는 미친 사람이요, 죽은 사람이요, 남의 침이나 받아먹고사는 사람이다.”


 이 말 자체도 아프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굴욕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더 상한 우리의 비뚤어진 데바닷다는 더더욱 비뚤어지게 되었다. 복수의 칼을 갈며 빅픽쳐를 그린 데바닷다는 하나씩 계획을 실행해 나간다. 그는 마가다국의 왕자 아자타삿투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도록 부추기고, 자신에 동조할 사람들을 모았다. 뒷배가 든든해지자 데바닷다는 다시 부처님께 나아가 나태에 빠진 교단을 개혁해야 한다며 다섯 가지 법을 주장한다. 


문헌에 따라 오법의 내용은 조금씩 다른데 <사분율(권4)>에 기록된 내용은 이렇다


첫째, 걸식한다.

둘째, 누더기 옷을 입는다.

셋째, 길 위에 앉는다.

넷째, 버터와 소금을 먹지 않는다.

다섯째, 생선을 먹지 않는다.


 주장의 핵심은 힘든 수행 그러니까 고행을 하자는 것이다. 데바닷다가 보기에 교단의 수행법은 너무 물러터져서 기준도 없고 흡사 놀고먹는 것처럼 보였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에 있어 한 가지 방법만 고집하지 않으셨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예외를 인정하셨는데 고행을 중요시 여기는 고대 인도 분위기에서는 고행이 정석이고 불교의 유연한 수행은 편법으로 비쳤을 가능성이 크다. 불교교단 내에서도 데바닷다의 주장은 꽤 많은 호응을 받았다. 언제 어디서나 빡세게, 제대로 하자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들의 강경함은 올바르고 성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그렇지 아니한가. 그 방법이 지속가능하냐는 별개지만.


  부처님께서는 데바닷다의 오법을 거부하셨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와 어긋나는 법이었다. 고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고행을 통해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고행이 맞지 않는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깨달으면 된다. 일률적으로 고행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었다.

 자신의 주장이 거부당하자 데바닷다는 얼씨구나하고 추종자들을 이끌고 교단에서 나가 딴살림을 차렸다. 경전에 따르면 꽤 많은 수행자들이 데바닷다를 따라 나갔다고 한다. 이때 부처님의 오른팔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해결사로 등장한다. 두 사람은 데바닷다 무리에 들어가 신통력과 말빨로 수행자들을 설득해 다시 데려온다. 이렇게 불교 초창기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여기서 끝이었으면 데바닷다는 루돌프 사슴코처럼 '길이길이 기억되지' 않았을 텐데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부처님을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굳이,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 데바닷다는 이미 선을 넘은 지 오래였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을 극도로 증오하고 있었다. 


 코끼리에 술을 먹여 부처님께 덤벼들게 만들었고(날뛰던 코끼리는 부처님의 말 한마디에 바로 조용해졌다), 산 위에서 돌을 굴러 떨어뜨려 부처님을 해치려 했으며, 자신의 손톱 밑에 독을 달라 부처님을 공격하려 하였다. 여기에 더해 청부살인을 하려 했다는 기록도 있다. 데바닷다의 모든 시도는 실패하였고, 오히려 손톱 밑에 발랐던 독이 퍼져 자기가 죽게 되었다. 그는 아비지옥으로 직행하였다. 



사진 3. 김해 정암사 벽화(출처: 제주불교)



 데바닷다는 무협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악당을 떠올리게 한다. 능력은 있지만 냉정하고 차가운 제자가(게다가 잘생긴!) 스승님을 제치고 새로운 리더가 되어 권력과 재물을 탐하지만 스승님의 진정한 수제자(천신만고 끝에 각성한)가 나타나자 몰락한다는 클리셰한 이야기에 나오는 나쁜 제자와 비슷하지 않은가. 데바닷다도 나쁜 제자도 자기 과신의 덫에 빠져들어 끝까지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한다. 오직 직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진! 파멸하는 그 순간까지도 욕망에 붙들려 이글이글 불타는 악당들은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짠해지기도 한다. 그 수고로움이 결국 무위에 그칠 걸 모르고 날뛰는 악당이 때로 애처로워 보일 때도 있다.  

 

 불교는 무아를 말한다. 데바닷다는 12년을 수행했어도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잘난 자기 자신에 집착하여 자기가 만든 감정에 휩쓸려버렸다. 들끓는 욕망, 맹렬한 증오심, 격정의 심연은 결국 그를 삼켜버렸다.


 데바닷다가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주장대로 오법을 지키며 죽는 날까지 고행을 하며 살았을까 아니면 절대권력에 취한 사이비 교주처럼 명성과 재산을 독차지하고 호의호식했을까. 데바닷다는 지옥으로 떠났지만 그의 교단은 오법을 지키며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5세기 인도를 방문한 법현스님은 '데바닷다의 무리가 있었는데 항상 과거 삼불에게 공양하였으나 오직 석가문불釋迦文佛(석가모니 부처님)에게는 공양하지 않았다고' <불국기>에 기록하였다.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을 부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데바닷다처럼 그 교단도 뒤끝 뚝심은 알아줘야 한다. 7세기에 인도를 간 현장스님과 의정스님 역시 데바닷다 교단을 보았으며, 이들의 의식과 교리가 불교와 다름이 없다고 기록하였다. 데바닷다 교단은 불교와 거의 같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인 듯 불교 아닌 듯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훗날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면서 데바닷다 교단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 지옥의 데바닷다는 어떻게 생각하려나(<법화경>에 의하면 데바닷다는 지옥에서 정해진 형기를 다 채우고 결국 부처가 된다고 한다).     



 자연에는 어떤 악당이 있을까. 누구나 악당의 최종 보스격으로 인간을 떠올리겠지만(그리고 정답이지만) 시야를 좁히고 좁혀서 한 종을 괴롭히는 작은 곤충에 포커스를 맞춰보려 한다. 괴롭힘을 당하는 대상은 밤나무이다. 주류라고 하기에는 망설여지지만 간식계의 한 영역을 당당히 담당하는 군밤, 밤식빵, 밤조림, 바밤바(이건 좀 세대차이가 있지만)를 있게 한 밤나무!!! 그러니 밤나무의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다. 밤나무를 괴롭히는 곤충, 밤나무혹벌을 알아보자.


 4~6월, 파릇한 잎을 매달고 나날이 싱그러워져 가는 숲 속에서 이런 게 눈에 띄곤 한다.

  

사진4. 밤나무혹벌 충영(출처: 왕바다리 블로그)


 아이들도 어른들도 꽃이나 열매 아니냐고 묻는데 저건 충영, 그러니까 벌레집(벌레혹)이다. 저 안에 곤충이 살고 있다.  벌목-혹벌과의 아주 작은 곤충인 밤나무혹벌이 주인공. 학명은  Dryocosmus kuriphilus Yasumatsu,  성충은 크기가 3mm밖에 안된다(사진 5 참조). 



사진 5. 밤나무혹벌 성충(출처: 농민신문)



 성충은 크기도 작은데 성충으로 지내는 기간도 짧아 겨우 4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여름에 충영을 뚫고 나온 성충은 부지런히 짝짓기를 하고 다시 밤나무 눈(줄기, 잎, 꽃이 되는 부분)에 알을 낳은 후 장렬히 죽는다.


 알은 0.2mm 정도로 작아서 맨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30여 일 뒤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는 거의 자라지 않는 상태로 이듬해 봄까지 겨울눈 속에서 버티는데 3월부터 비로소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다. 



사진 6. 충영 속 밤나무혹벌 애벌레(출처: 농사로)



 애벌레가 커지면서 충영 역시 4월부터 눈에 띄게 커지고 붉어져 밤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발견하기 쉬워진다. 충영 속에서 밤나무의 양분을 훔쳐먹으며 자란 밤나무혹벌은 6월 즈음에 번데기가 되었다가 성충이 되어 7월에 충영 뚫고 나와 자신의 어미가 그랬듯 맹렬히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고 죽는다.  


 꽃 같기도 하고 열매 같기도 한 작고 예쁜 충영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밤나무 가지가 자라지 못하여 꽃도 못 피고, 열매(그러니까 밤)도 맺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어도 크기가 작아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충영은 성충이 탈출한 이후 말라버린다. 충영의 피해를 몇 년간 입다 보면 가지가 말라버리거나 아예 나무 전체가 고사하는 경우도 많다. 겨울에 산행을 하다 보면 나무 가지에 정체불명의 동그란 무언가를 여기저기 달고 있는 나무를 보게 되는데 밤나무나 참나무일 가능성이 크다. 겨울이 되어 잎이 떨어지면 말라비틀어진 충영이 더 잘 보인다.  



 밤나무혹벌은 우리나라에서만 골칫거리가 아니다. 1941년 일본에서 처음 확인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59년 경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처음 발견되어 신종으로 발표되었는데(그래서 학명에 Yasumatsu 가 들어있다) 나중에 중국이 원산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도 우리나라도 요 자그마한 곤충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는데(우리나라의 경우 재래종 밤나무가 거의 전멸했다고) 밤나무혹벌에 견디는 내충성 품종(내충성 품종의 눈 속 있던 애벌레는 겨울을 지내는 동안 다 죽는다)을 재배하고, 밤나무혹벌의 천적(대표적으로 중국긴꼬리좀벌)을 이용하여 효과를 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밤나무혹벌은 밤 농가를 떨게 하는 제1의 원흉으로 여겨지고 있다. 


 2021년 뉴스에 따르면 충남 부여군 전체 밤 재배면적의 42%가 혹벌 피해를 봤다고 한다(각주 1). 혹벌 알과 애벌레는 나무 눈 속에 꽁꽁 숨어있기 때문에 농약을 쳐도 없애기가 힘들다고. 1978년부터 믿었던 내충성 품종들에도 혹벌이 생기고 있고, 피해 지역도 넓어져서 앞으로의 밤 농사가 어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대사처럼 언젠가 답을 찾겠지만은 그때까지 밤나무혹벌은 골칫거리가 아닌 재앙으로 군림할 수도 있다.  군밤, 밤식빵, 바밤바가 이제는 볼 수 없는, 라떼의 간식으로 남지 않아야 할 텐데... 



 데바닷다도 밤나무혹벌도 악당이라 부르면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다. 그분의 기분은 일단 제쳐두고,  '기분이 태도가 된' 데바닷다가 악당인 건 확실하다. 부처님을 살해하려던 시도는 실패에 그쳤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살해는 성공하기도 했다. <파승사(권 10>에는 연화색 비구니를 때렸고 이로 인해 연화색 비구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으며, <증일아함경(권 47)>에는 자기에게 충고한 법시 비구니를 때려서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행위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 없다. 

 이번에는 밤나무혹벌. 밤나무를 죽게 만드는 밤나무혹벌은 나쁜 곤충인가? 요건 좀 애매하다. 익충이니 해충이니 하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 일뿐, 자연의 입장에서는 익충도 해충도 없다. 생명체들은 서로 먹고 먹히면서 먹이사슬을 이룬다. 여기에 좋다 나쁘다는 도덕적 판단이 들어설 틈은 없다. 밤나무혹벌은 밤나무에게는 악당이지만 긴꼬리좀벌에게는 맛난 먹잇감이다. 인간들이 '밤나무혹벌! 너는 악당이야.'라고 비난한다면 밤나무혹벌은 금자씨 마냥 '인간! 너나 잘하세요.' 하며 되받아치지 않을까.



  요즘 E채널의 <용감한 형사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 하나. 악당들은 하나같이 계획과 명분이 있다. 나쁜 짓을 벌이고 나서 붙잡힌 후에야 나름의 정당함(전부다 피해자 탓을 한다)과 어쩔 수 없음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 기가 찬다. 그깟 명분 깊숙이 넣어 두고서 제발 가만히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의 명분이란 바스러지기 쉬운 한없이 연약한 것이어서 보고 또 보고, 판단하고 또 판단해야 하지만 아무리 신중한 명분과 잣대라 하더라도 자연을 재단하면 안 된다.  자연의 악당은 악당이 아닐 수 있으니까.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의 악당일 수 있으니까. 







각주

1.  서륜, "이 작은 혹벌에... 밤농가 벌벌," 농민신문, 2021년 7월 3일 수정, https://www.nongmin.com/article/20210702340974





사진각주

1. Wellcome collection, "Nalagiri, A ferocious elephant, sits listening to Buddha," 2024년 1월 15일 접속, https://wellcomecollection.org/search/images?query=buddha

2. 불광미디어, "자현스님이 들려주는 불교사 100장면 - 붓다의 탄생," 네이버포스트, 2018년 11월 12일,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17080410&memberNo=3877558

3. 법상스님, "법상 스님의 사찰에서 만나는 벽화 - 부처님을 해치려는 제바달다" 제주불교, 2021년 2월 24일

http://www.jeju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800

4. 왕바다리, "밤나무혹벌(밤나무순혹벌) 충영," 왕바다리의 생태정원(블로그), 2016년 5월 12일,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prothneyi&logNo=220706051679

5. 서륜, "이 작은 혹벌에... 밤농가 벌벌," 농민신문, 2021년 7월 3일 수정, https://www.nongmin.com/article/20210702340974

6. 농사로, "Dryocosmus kuriphilus 밤나무혹벌," 2024년 1월 15일 접속, https://www.nongsaro.go.kr/portal/ps/psw/pswa/pswaa/clgruppDtl.ps?menuId=PS03768&sortField=&sortOrder=&pageIndex=1&pageSize=3&sNckEsntlNo=&sFmlEsntlNo=&sSpcsEsntlNo=ZT1AY0005&sSampleSeqNo=&sDoCode=&sSigun=&sDoCodeNm=&sSigunNm=&sGubun=hlsctCropDtl&sPlntSeCode=349002&sPlntEsntlNo=7107&srchType=1&sType=349002&sText=&sSrchText=&sSrchType=&sStrType=




참고문헌

1. 농사로. "Dryocosmus kuriphilus 밤나무혹벌." 2024년 1월 15일 접속. https://www.nongsaro.go.kr/portal/ps/psw/pswa/pswaa/eclgyInfoDtl.ps;jsessionid=XiidxJpxmu35vN2yeFbdBKsfrTqXLEXhyxUdihNykHnZtMwgxV6x7DRsLYo0Sa7D.nongsaro-web_servlet_engine1?menuId=PS03768&sortField=&sortOrder=&pageIndex=1&pageSize=3&sNckEsntlNo=&sFmlEsntlNo=&sSpcsEsntlNo=ZT1AY0005&sDoCode=&sSigun=&sDoCodeNm=&sSigunNm=&sGubun=hlsctCropDtl&sPlntSeCode=349002&sPlntEsntlNo=7107&srchType=1&sType=349002&sText=&sSrchText=&sSrchType=&sStrType=

2.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이창신 역. 서울:김영사, 2010.  

3. 란지푸, 데바닷다 그는 정말 악인이었는가. 원필성 역. 서울:운주사, 2004. 

4. 김종국. "밤나무혹벌과 천적." 수목보호 no.3 (1997): 10-14. 






                    

이전 04화 3월, 장수하늘소와 인도불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