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밝히는 이들의 정체를 밝혀라
요즘 친구들은 이 노래 알라나 몰라~~ 꼰대스러운 말로 서문을 열어 본다. 이 노래라 함은 1987년 신형원이 발표한 '개똥벌레'이다. '개똥벌레'는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라는 체념으로 시작하여 내내 짠한 외로움을 토해내다가 '울다 잠이 든다'로 마무리를 짓는, 대놓고 구슬픈 노래이다. 가사는 지극히 우울하지만 80~90년대에 전국구로 유명세를 타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애창했었다. 이 노래의 주인공 개똥벌레를 곤충도감에서 찾아보자. 눈을 씻고, 비비고, 부릅떠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개똥벌레는 별명이기 때문이다. 개똥벌레의 정식 이름은 바로바로바로 '반딧불이'다.
반딧불이는 딱정벌레목에 속하고 종마다 앞가슴등판(아래 사진에서 노란색 혹은 주황색 부분)이 다르게 생겼다.
반딧불이를 보기는 쉽지 않다. 꽤나 귀한 몸이기 때문이다. 귀한 몸인 이유는 예민한 몸이기 때문이다. 수질과 대기 오염에 취약한 반딧불이는 다른 많은 곤충들처럼 환경오염(주로 농약), 서식지 파괴 등으로 인해 개체수가 팍 줄어서 이제는 보기 드문 곤충이 되었다. 1982년 무주군 설천면 청량리 일대가 '반딧불이와 그 먹이(다슬기) 서식지'로 천연기념물 제322호에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주로 애반딧불이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환경 변화로 반딧불이의 수가 줄자 수년간의 연구&조사 끝에 기존 지역은 보호구역에서 해제하고, 새로운 지역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이름도 '무주 일원 반딧불이와 그 먹이 서식지'로 바뀌었다(2021년부터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몇 호라는 말이 빠졌다).
현재 무주군 설천면 장덕리 수한마을은 애반딧불이, 무주읍 가옥리 가림마을은 운문산반딧불이, 무풍면 금평리 88올림픽숲은 늦반딧불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서 추천 영상 하나 보고 가시지요(강추강추).
꽁무니에서 불빛을 내는 신기한 곤충 반딧불이에 대해서는 책뿐만 아니라 영상이나 도서, 웹자료가 많기 때문에 어떻게 생겼는지, 불빛의 정체는 무엇인지, 어디서 불빛이 나는지 등 일반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중요한 듯하면서 안 중요하고, 궁금한 듯하면서도 딱히 알고 싶지 않고, 지루한 듯하면서 역시나 지루한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 바로바로바로 '우리나라에는 몇 종류의 반딧불이가 살고 있을까'이다. 이야... 벌써부터 노잼의 암울한 기운이 느껴지지만 고고씽.
원래 쓰려고 했던 내용은 이게 아니었다. 글 서두에 잠깐 언급만 하려고 구글을 뒤질 때만 해도 이렇게 어려운 문제인지 예상하지 못했다. 검색어를 넣으면 답이 톡 하고 나올 줄 알았지... 눈이 퀭해지도록 몇 날 며칠을 검색에 검색에 또 검색을 하였지만 속 시원한 답을 찾지 못하였으니 오호통재라. 그간 들인 시간과 노오오오력이 헛되지 않도록 반딧불이에 대해 흥미롭지만 쉽게 알 수 있는 정보 대신 흥미는 떨어지지만 어디서도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는 '한국에 서식하는 반딧불이 종류'를 말해보려 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이 없기에(이미 학계에서는 정리가 되었는데 내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본 자료들을 정리해 보겠다.
1. 2019년 국립생물자원관에서 발행한 <국가생물종목록 ⅠII. 곤충>에는 총 7종이 실려있다.
반딧불이과 - 반딧불이속 - 북방반딧불이 Lampyris noctiluca (Linnaeus, 1767)
반딧불이과 - 늦반디불이속 - 늦반딧불이 Pyrocoelia rufa (Olivier, 1886)
반딧불이과 - 꽃반딧불이속 - 꽃반딧불이 Lucidina kotbandia Park & Kang, 2005
반딧불이과 - 애반딧불이속 - 파파리 반딧불이 Luciola (Hotaria) papariensis Doi, 1932
반딧불이과 - 애반딧불이속 - 애반딧불이 Luciola (Luciola) lateralis Motschulsky, 1860
반딧불이과 - 애반딧불이속 - 운문산반딧불이 Luciola (Luciola) unmunsana Doi, 1931
반딧불이과 - 갈색반딧불이아과 - Drilaster 속 - 큰흙갈색반딧불이 Drilaster unicolor Lewis, 1895
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 사이트에도 위와 같이 7종이 등록되어 있다.
2. 2009년 발행된 <한국의 반딧불이>에서는 2아과 5속 5~7종으로 추정하였는데 여기서는 파파리반딧불이와 운문산반딧불이를 같은 종으로 보고 있다.
위 표는 책 9쪽에 있는 분류표이다. 순서와 국명은 내가 추가하였다. 9번은 아무래도 Lucidina biplagiata (Motschulsky) 의 오기로 보이며, '한반도의 생물다양성'에서는 9번과 10번을 꽃반딧불이 Lucidina kotbandia Park and Kang, 2005 의 학명이명으로 표기하였다. 학명이명은 한 종의 다른 이름을 말한다. 비고에도 '불존재 가능성 높음' 과 '미확인'으로 되어있으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불빛을 내지 않아서 그런지 여기에는 꽃반딧불이가 빠졌다(유충은 약한 빛을 내고 성충은 빛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3번은 신종이다. 2003년 농업과학기술원에서 펴낸 보고서 <반딧불이과의 분류 및 보전종 평가>에 의하면 새로 발견된 요 녀석은 애반딧불이와 염기서열에서 2% 이상의 차이가 있고 서식처도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미확정으로 분리했는데 이 녀석에 대한 후속연구가 없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정보가 없다. 저기여... (각주 1)
한영식이 쓴 <반딧불이 통신>에 재미있는 실험이 실려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고사성어를 직접 실험한 건데 반딧불이 85마리를 잡아 채집상자에 넣으니 작은 글자는 읽기 어려웠고, 180마리를 잡으니 작은 글자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 하기에 생각보다 어둡고, 이 상태로 읽다가는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눈이 지칠 거라는 평을 남겼다. 찾아보니 SBS 프로그램 <호기심천국>에서도 반딧불이로 책 읽기 실험을 했다고 한다(보지는 못했다).
이제는 이렇게 잡을 반딧불이도 없고, 밤을 낮처럼 만드는 빛이 너무 많아 빛공해라는 말이 생길 정도이니 반딧불이에게도 사람에게도 21세기는 쓰라린 가슴 안고 울다 잠이 드는 거친 세상이 되었다.
반딧불이 축제는 원조인 무주반딧불축제가 가장 유명하지만 무주 외 지역(제주, 영양, 옥천 등등)에서도 한다. 심지어 서울에서도 하는데(2019년까지 '축제'란 타이틀을 내걸고 크게 했다) 그곳은 바로 길동생태공원이다. 2000년 무주에서 도입한 애반딧불이 219마리를 처음에는 남산에서 인공사육 했지만 2004년 길동생태공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2010년 자연서식지를 조성했고 2011년 7천 마리를 방사했는데 매년 5천 마리가 관찰된다고(각주 2). 그러므로 애반딧불이의 서울 이주는 로맨틱, 성공적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6~7월에 출현하는 반딧불이는 애반딧불이와 운문산반딧불이(파파리반딧불이)이다. 반딧불이는 밝은 곳에서는 빛을 내지 않는다. 늦게 해가 저문 여름밤, 스피드 011 광고 문구처럼 반딧불이의 세상과 만나기 위해 잠시 핸드폰을 끄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고 싶다.
변변한 인공조명이 없던 옛날, 사람들은 어둠을 밝힐 빛을 간절히 바랐다. 종교에서도 빛은 중요한 메타포로 쓰였는데 어둠뿐만 아니라 무지, 악습과 관습, 죄 등을 몰아내는 진리 또는 정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기독교에서는 '빛과 소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불교에서는 윤회의 근본 원인이 무명無明(말 그래도 빛이 없다는 뜻이다)이라고 말한다(12 연기는 무명에서 시작된다).
절에 가면 대웅전 마당이나 공터에 석등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석등은 실제로 불을 넣어 밤을 밝히는 용도로 쓰기도 했고, 불교의 진리가 중생들을 깜깜한 무지에서 밝은 해탈로 이끈다는 상징물로써 설치되기도 했다.
석등이 빛을 이용한 대표적인 조형물이라면, 빛이 들어간 유명한 문구는 무엇일까. 아마도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이 아닐까 한다. 자등명법등명은 어디서 나온 말일까. 이 문구는 <대반열반경>, <상윳타니까야>(잡아함경) 등 여러 곳에 나온다.
한역 경전인 <불설장아함경>의 제6권 <전륜성왕수행경>에 있는 내용은 이렇다.(각주 3)
너희들은 마땅히 스스로 맹렬히 정진하되[熾燃], 법(法)에 맹렬히 정진하고 다른 데에 맹렬히 정진하지 말라. 스스로 귀의하되 법에 귀의하고 다른 데에 귀의하지 말라.
어떤 것을 '비구가 스스로 맹렬히 정진하되 법에 맹렬히 정진하고 다른 것에 맹렬히 정진하지 말며, 스스로 귀의하되 법에 귀의하고 다른 데에 귀의하지 말라'고 하는가? 비구는 안 몸[內身]을 관찰하여 부지런히 힘써 게을리하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 잊지 않아 세상의 탐욕과 걱정을 없애야 한다. 바깥 몸[外身]을 관찰하고 안팎 몸[內外身]을 관찰하여 부지런히 힘써 게으르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 잊지 않아 세상의 탐욕과 걱정을 없앤다. 감각[受]과 뜻[意]과 법(法)의 관찰도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하느니라.
이것을 '비구는 스스로 맹렬히 정진하되 법에 맹렬히 정진하고 다른 것에 맹렬히 정진하지 말며, 스스로 귀의하되 법에 귀의하고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이 내용이 흔히 알려진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 '이다. 풀이하자면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고, 자기에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는 뜻이다(귀의한다는 의지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디가니까야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각주 4 / 『디가니까야』 「제3품 빠띠까의 품」 「26. 전륜왕 사자후의 경(Cakkavattsīhanādasutta)」)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되,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말라
동아시아에서 보는 한역 경전, 그러니까 중국에서 번역한 경전은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으라 하고, 상좌부불교권(동남아시아 불교)에서 보는 니까야 경전에서는 자신과 법을 '섬'으로 삼으라고 한다. 등불? 섬? 예전에는 이런 의문조차 없었다. 무조건 '자등명 법등명', 그러니까 등불의 비유만 있었다. 그런데 2000년대 전후로 니까야 직역&완역본이 출간되고, 동남아시아에서 공부하거나 수행한 스님 및 재가자가 늘어나면서 '등불'이 아니라 '섬'이 바른 번역이라는 이의가 제기되었다.
등불과 섬.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두 단어는 어쩌다 혼란을 부추기게 되었나. 스리랑카와 태국에서 초기불교를 공부한 마성스님은 논문 「자등명 법등명의 번역에 대한 고찰」에서 섬과 등불 둘 중 어느 것이 옳은지 차근차근 짚어본다.
니까야는 팔리어로 쓰였다. 팔리어에서 dīpa 라는 단어는 등불 또는 섬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지에 대해서 후대 번역가들은 꽤나 골머리를 썩였는데 5세기 대주석가였던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 역시 이 난제 앞에서 머뭇거렸다. 겨우 5세기에도 이 문제는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섬'이었다.
마성스님은 다양한 경전에서 dīpa가 어떻게 번역되는지 예시를 차르르르 들다가 상응부 경전과 주석서에서 dīpa가 피난처(tāna), 동굴(leṇa), 운명(gati), 목적지(parāyaṇa), 의지처(sara-ṇa) 등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결정적으로 산스크리트어 경전과 티베트어 경전, 간다라 언어로 쓰인 경전에서도 등불이 아닌 섬으로 표기되었음을 밝히고, 자등명법등명이 아니라 자주自洲 법주法洲 임을 만천하에 고한다.
자신을 섬으로 삼는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중앙승가대 교수인 자현스님은 BBS <붓다로드>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인도에서는 우기 때 저지대가 물에 잠기면 사람들은 임시로 고지대로 이동하는데 그 장소를 섬(피난섬)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섬, 그러니까 흔히 생각하는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나, 강이나 댐 중간에 있는 섬이 아니라, 피난을 위한 일시적 섬이라는 것이다. 섬의 비유는 인도에서 일반적이고 적절한 비유였을 테지만 세월이 지나 경전이 다른 문화권으로 넘어오면서 전후맥락과 설득력을 잃어버렸고 이에 갸우뚱한 번역가들은 섬 대신 등불이란 뜻을 대신 취하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마성스님의 논문이 발표된 건 2003년. 그 뒤로도 종종 이 사실을 아는(?) 몇몇 스님들께서 등불이 아니라 섬이라고 말씀하고 다니시지만 천년이 넘게 사용한 '자등명 법등명'은 여전히 건재한다. 2023년 4월 프랑스에서 귀국한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공항에서 어떤 쪽지를 받았다. 어느 여인이 건넨 그 쪽지에는 '자등명 법등명'이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그 의도야 나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자등명 법등명' 대신 '자주 법주'라고 쓴 쪽지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아마 자등명 법등명만큼 바로 이해되지도 와닿지도 않았으리라. 오랜 세월 동안 '자등명 법등명'에게 의지했던 동아시아인들에게는 변화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아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려나. 10년 뒤, 20년 뒤 불자들은 '자주 법주'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등명법등명도 개똥벌레의 전철을 밟아 언어의 뒤안길로 사라지겠지만 그 빈자리를 자주법주와 반딧불이가 채울 테니 걱정은 없지만 말이다.
'자등명법등명'도 좋고 '자주법주'도 좋다. 결국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붙잡고 살아간다. 선택도 책임도 결과도 다 내 것이다. 물론 모든 걸 개인의 몫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개인이 사회 속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사회적 책임이 개인적 책임 못지않게 얼마나 중요한지 뉴스를 통해, 개인적 경험을 통해 나날이 확인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반딧불이는 짝을 찾기 위해 불빛을 낸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홀로 울다 잠이 드는 누군가를 위해 위로와 공감의 불빛을 건네야 하지 않을까.
1. 박해철 외, 반딧불이의 분류 및 보전종 평가(국립농업과학원, 2003)
https://www.naas.go.kr/02_research/Research_Read.do?menu_code=2&mmode=21&tg=1&ntceSnn=1692
2. 배우썬, "서울에서 '반딧불이 자연서식지'가 있는 <길동생태공원> 무료 입장 사전예약제로 한적하게 걷기 좋은 숲길," 한번의 인생...날아 오른다...일과여행^^(블로그), 2022년 7월 20일, https://m.blog.naver.com/sh28ho/222821156027
3. 한글대장경, "불설장아함경:제6권 전륜성왕수행경," 2024년 1월 25일 접속, https://abc.dongguk.edu/ebti/c2/sub1.jsp
4. 전재성, 디가 니까야 전집, 서울: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6, 1110-1163.
1.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 [신비한 생물사전] 반딧불이는 어떻게 빛을 낼까," 네이버 포스트, 2019년 10월 10일,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26309652&memberNo=27906075&searchKeyword=%EB%B0%98%EB%94%A7%EB%B6%88%EC%9D%B4&searchRank=1
2. 김효종, "무주반딧불축제, 코로나19 상황 감안해 미니축제로 진행," 전북일보, 2021년 7월 7일 수정, https://www.jjan.kr/article/20210707735897
3. 최우성, "한국 석등의 아름다운 매력,' 우리문화신문, 2022년 11월 5일, https://koya-culture.com/mobile/article.html?no=137834
1. 문화유산채널, "무주 일원 반딧불이와 그 먹이 서식지," 2015년 10월 7일, 동영상, 5:17, https://www.youtube.com/watch?v=d_cD9RL3L8U
1. 김종길 외. 한국의 반딧불이. 경기:농촌진흥청, 2009.
2. 디지털무주문화대전. "무주 일원 반딧불이와 그 먹이 서식지." 2024년 1월 15일 접속, http://www.grandculture.net/muju/toc/GC06500255
3. 한영식. 반딧불이 통신. 서울:사이언스북스, 2009.
4. 이수창(마성). "자등명 법등명의 번역에 대한 고찰." 불교학연구 no.6(2003):157-184.
https://journal.kabs.re.kr/articles/pdf/QPYa/ksbs-2003-006-00-6.pdf
5. 자현. "섬이 등불이 된 사연! 피난 섬에 얽힌 미스테리 - 자현스님의 붓다로드 31회.", 자현스님의 쏘댕기기 - 선불교연구소. 2019년 11월 28일. 동영상. 45:07. http://www.btn.co.kr/pro/Program_contents.asp?ls_StSbCode=CATPR_10&page=8&pid=P1117
6. 전재성. 디가 니까야 전집. 경기: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