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용어 중 하나가 '카타르시스'이다. 대략적으로 이 용어의 쓰임새를 살펴보면 '이 사건을 통해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줘야 한다.'거나 '카타르시스를 일으키기엔 조금 임팩트가 부족해' 등과 같은 느낌으로 쓰이는 것 같다. 물론 웹소설은 대중의 카타르시스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는 콘텐츠이기에 이런 표현이 아주 틀리지는 않다. 다만 필자는 이 용어가 갖는 함의가 풍부하기에 보다 깊숙히 고찰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카타르시스'는 도대체 어떤 용어일까? 그리고 웹소설에서의 카타르시스란 어떤 메커니즘을 의미하는 것일까?
'카타르시스(Katharsis)'는 문학전공자들에게 그리 낯선 개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아주 깊이 파고드는 개념도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 영역에서는 이보다 훨씬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이 많거니와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은 자체로도 참고문헌이 많지 않아 밀도 높은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사실 흔히들 이해하는 것처럼 '카타르시스'를 대체로 재미나 쾌감, 혹은 만족감과 같은 뉘앙스로 이해해도 무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언젠가 '웹소설'의 연구가 질적으로 깊어진다면 이 용어가 각별히 중요해지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한번 쯤은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타르시스란 용어는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발견된다. 시학 6장의 비극을 정의하는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비극은 심각하고 완전하며 일정한 크기가 있는 하나의 행동의 모방으로서 그 여러 부분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아름답게 꾸민 언어로 되어 있고 이야기가 아닌 극적 연기의 방식을 취하여 연민과 두려움을 일으켜 그런 감정들의 카타르시스를 행하는 것이다.
살펴보는 것처럼 '연민과 두려움을 일으켜 감정들의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것이 곧 비극의 정의로 규정될 만큼 카타르시스 개념이 매우 비중있게 설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는 어떻게 말해지고 있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이 용어는 해당 문장 외에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즉, 현재까지 남아있는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은 단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연구자들이 비극의 정의에 등장하는 '카타르시스'를 두고 다양한 논쟁을 해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나 다른 텍스트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필자 역시 그들의 논의를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다만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관점에 수렴될 것이라는 데에는 공통적인 견해를 보이는듯 싶다.
1. 배설(排泄)
2. 정화(淨化)
첫번째 정의는 쌓여진 내적 불순물을 밖으로 내보낸다는 맥락에서 카타르시스를 '배설'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두 번째 정의는 구조화된 이야기를 통해 내면을 깨끗하게 한다는 점에서 카타르시스를 '정화'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 글의 목표가 『시학 』의 구절을 설명하는 데에 있지 않기에 간략히 정리하자면, 카타르시스는 대략 '플롯으로 생성된 연민과 두려움'을 통해서 나타나는 해소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카타르시스는 '수신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정의하는 독특한 개념인 것이다.
낙산공원에서 찍은 서울의 야경
그런 의미에서 반추해보자면 웹소설 판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카타르시스' 개념이 다소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타르시스의 본질은 '배설 또는 정화로 인한 해소'에 있는데, 일반적인 쓰임새는 오히려 그 이후에 오는 '쾌감 혹은 즐거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카타르시스는 심리적 작용의 일부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 고유의 즐거움은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난 직후에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웹소설에서 흔히들 말하는 쾌감 혹은 즐거움을 『시학』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햐야 타당할까. 필자는 시학을 공부했지만 시학만을 전문로 하는 전공자는 아니기에 발언이 조심스럽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웹소설의 즐거움은 연민과 두려움을 통한 정화라고 보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웹소설은 비극 고유의 즐거움이라는 고전적인 양식을 따르기보다는 본질적으로 다른 형태의 플롯을 지향하며 바로 그로 인한 즐거움이 존재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웹소설은 도대체 어떤 형태의 카타르시스와 즐거움을 갖고 있는 것일까.
단서로 눈여겨볼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연민과 두려움을 통한 환기와 카타르시스로 인한 즐거움'을 비극 고유의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저서 『정치학』8권 7장에 등장하는 음악의 카타르시스는 다른 원리와 맥락에 따라 이뤄진다는 점 역시 주목해볼만하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몇 가지 추론을 제기해볼 수 있는데, 과연 비극이 아닌 희극의 플롯도 동일한 양상으로 전개되는가와 더불어, 만일 희극이 그러하지 않다면 수천년을 뛰어넘어 또 다른 플롯적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웹소설 역시 다른 형태로 카타르시스와 즐거움을 생성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만약 그렇다면 웹소설은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카타르시스와 즐거움을 가지는 것으로 유추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이상의 논의는 지나치게 근거가 부족한 지레짐작에 가깝기 때문에 더 이상 진척시키기 어려워 보인다.
카타르시스에 대한 논의는 여기에서 막혔지만, 다른 한편으로 머리에서 떠오르는 무척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온라인상에서 누가 처음 썼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고구마와 사이다'라는, 드라마나 웹소설 게시판에서 흔히들 보이는 표현이다. 보면 볼수록 참 기가 막히는 한국적인 경험에 기반한 언어(동시에 대중적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고구마를 먹을 때의 그 속이 꽉 막히는 답답함을 시원달달한 사이다로 씻어내리는 짜릿함과 개운한 쾌감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했던듯 싶다. 주로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알아채지 못해서 생기는 실수 혹은 상황적으로 궁지에 내몰리는 사건이 나타나면서 절로 가슴을 두드리게 되는 답답함을 마치 '고구마 먹은 것처럼 체한 것 같다'고 표현하고, 반대로 이러한 위기나 갈등으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을 두고 '크~ 사이다다!'라는 속시원한 탄성을 자아내는 것이다.
고구마와 사이다 간 관계의 본질은 '답답함'과 '시원함'에 있다. 다양한 문학개론에서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이 '답답함'은 '갈등에서 오는 얽힘'을 의미하는 것이며, 대조적으로 '시원함'은 얽힌 '그렇게 얽힌 갈등이 풀리어 해소됨'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대중들은 사이다를 무척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봤을 때 웹소설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10%의 고구마와 90%의 사이다로 구성된 콘텐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혹은 고구마가 고구마로 느껴지지 않는 테크닉이 첨가되었거나.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연구자들이나 문학 전공자들은 웹소설을 놓고 몹시 기형적인 구조라고 평가하거나 깊이가 부재하고 재미만을 추구하는 포르노 콘텐츠라고 극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이들에게 '해소, 즉 사이다 부분만을 극단적으로 늘리거나 혹은 아예 사이다만으로 작품으로 만들어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한두번은 어렵지 않을 수있어도 이것을 서사 전반으로 이끌어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주인공의 무한한 상승으로만 구성된 서사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웹소설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고도의 기술적 정련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 사이다의 미학을 웹소설 고유의 미학인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마치며. 비록 유의미한 담론을 생산해내지는 못했지만 시도 자체는 나름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거의 일 년만에 『시학』을 펼쳐보았다. 퍽 감회가 새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책이 어째서 25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새삼 느낀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특히 우리나라보다 유럽이나 미국의 할리우드와 같은 서구 사회에서 거의 절대적인 위상을 자리한다. 그러나 그런 위상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간략히 소개되고 있어 아쉬울 따름이다.
한편 이러한 생각과 별개로 웹소설에서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이 비중있게 다뤄지는 것은 상당히 주목할만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마음만 있다면 이 개념을 웹소설의 새로운 미학적 개념으로 정립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시대가 변하여 그런 논문을 볼 수 있기를, 혹은 필자가 그런 논문을 쓸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참고문헌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조동일, 『카타르시스, 라사, 신명풀이』
이상섭,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연구』
권혁성,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극에 고유한 즐거움」, 美學 Vol.88 No.2, 2021
권혁성,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에 대한 재고」, 美學 Vol.87 No.3,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