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도의 한창 바쁜 연말에도 놓지 않고 재미있게 보던 드라마가 있었다.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웹소설 원작을 드라마로 각색한 작품이었다. 초중반부까지는 정말 재미있게 보다가 후반부에 서서히 힘이 떨어지더니 급기야 실망스러운 결말로 작품의 평가를 추락시킨, 어떤 의미로는 역대급 드라마였다. 결말 부분만 잘 만들어졌다면, 나는 지난 해 최고의 드라마는 우영우를 제쳐놓고 단연코 '재벌집 막내아들'이라고 했을 것이다. (최근 더 글로리를 본 이후에는 지난해 최고의 드라마가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재벌집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워낙 유명하여 굳이 언급하지는 않으련다. 본고는 그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 작품은 '왜 화려하게 성공했으며 왜 화려하게 실패했을까'를 간단히 짚어보고자 한다. 즉 이번 글은 웹소설을 애정하는 마음에서 드라마에 대한 진단을 함께 해보려는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회귀/환생 모티프가 드라마에서 먹힐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왜냐하면 회귀 모티프에 내재된 욕망이 절대 다수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까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인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웹소설을 드라마화로 성공한 케이스는 지금까지 로맨스물이나 사극물 등이 아니면 거의 없지 않았던가. 그러나 재벌집은 그런 우려를 말끔하게 그리고 멋지게 깨버렸다. 이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시사하는데 첫째, 웹소설이 충족시켜주는 욕망과 영화나 드라마 등의 대중서사의 욕망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 둘째, 웹소설의 대중화 가능성이 생각 이상으로 훨씬 컸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분명한 점은 재벌집을 기점으로 웹소설이 IP로서의 가치가 훨씬 높아졌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제작사나 투자자들이 대거 나타나리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웹소설 시장을 향한 기대가 높아진다고 하겠다.
이미지 출처 : JTBC
드라마의 내용을 살펴보자. 일전에 회귀 모티프와 환생 모티프 각각에 대해서 논의할 때 일련의 모티프들은 주인공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해서 과거의 사건들을 극복해나가는 서사가 핵심이 된다고 짚어본 바 있었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정말 대단한 것은 모티프 활용을 여기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앎'을 주인공만이 아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 대다수가 아는 사건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즉 <재벌집 막내아들>은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 예를 들어 양김단일화 실패사건, 분당 땅 매입, 1998년도 IMF, 2002 월드컵 4강신화, 영화 나홀로집에와 타이타닉의 성공, DMC의 성공 등 다양한 굵직한 사건들을 갖고 과거로 돌아가서 이를 무기삼아 성공신화를 일궈내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본격적인 과거는 IMF시절 이후로부터인데, 그보다 훨씬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더 오래 전의 사건을 어떤 식으로 다루느냐에 대해 흥미를 갖고 이 드라마를 접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 말해, <재벌집>은 초반부터 이미 다양한 연령층을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눈여겨 볼 점은 이 말도 안되는 서사들이 주인공은 물론 우리도 이미 알고있다는 전제 하에서 모두 용인되고 있으며(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주인공 진도준을 향해 '천재'라는 주변의 존경스러운 시선도 뒤따라붙는다는 점이다. 이는 웹소설의 전형적인 전개방식으로 드라마가 웹소설의 전개를 고스란히 수용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재벌집 막내아들은 결코 진도준만의 서사가 되지 않는다. 즉 진도준의 성공은 오직 그만의 성공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대리 성공이기까지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은 진도준의 앎을 활용한 성공으로부터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드라마에서 이런 식으로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고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작년에 중반부까지의 전개를 보면서 보면서는 우영우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일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단순히 웹소설에서나 먹힐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티프를 드라마적으로 재현했고 그것을 성공시켰다는 점을 특히 고평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후반부, 특히 마지막화를 보면서 대폭 사라졌다. <재벌집>의 마지막 화는 얼마나 수준 높은 플롯적 완성을 추구했던간에, 환몽구조를 설계한 시점에서 그때까지의 진도준의 성공 서사와 함께 달려온 독자들을 무참히 실망시킨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부터 짚어보자. <재벌집 막내아들>의 성공은 캐릭터와 그것을 열연한 배우들의 연기가 크게 일조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드라마는 무엇보다 돈을 향한 '욕망'을 긍정하고 그것을 캐릭터 개개인들에 담아 탁월하게 전개했다. 필자에게는 단연코 진양철 회장(이성민 역)이 최고였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포스와 아우라, 그리고 때때로 보여주는 경영능력과 더불어 손자를 향한 애정 그리고 마지막의 쓸쓸한 최후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대중들이 돈을 향한 욕망을 비판하고 약자를 동정해야 한다는 진도준(송중기 역)의 교훈적인 서사보다는(심지어 이것은 드라마의 중심 서사였다!) 진양철 회장의 탐욕스럽고 잔혹한 모습들에 더욱 매료되었다는 사실이다. 대중들은 이러한 전형적이면서도 동시에 입체적인 모습을 콘텐츠에서 원한다. 알기 쉬우면서도 그럼에도 매료될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들을 의도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재벌집> 전반부의 내용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전반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중후반부의 서사에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전반부를 지배한 진양철의 캐릭터성은 만족스러웠지만 그 이후, 즉 후반부에서 보여준 그 아래의 오너일가들 즉 진영기, 진동기, 이항재, 진성준, 오세현 등 다채로운 색깔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리고 고도의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게 무척 아쉬웠다. 이는 배우들의 연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말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후반부로 들어설수록 거대기업을 운영하는 오너 일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뻔한 술수에 걸려들고 캐릭터들을 유치하게 표현하기 일쑤였다. 즉 오너 일가의 캐릭터들에게 내포된 정치적 능력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이야기의 패턴화가 이뤄지고 그로인한 매너리즘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급기야 마지막 화에서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또다시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윤현우의 시점으로 되돌아왔지만, 그것은 최악의 수였다. 각별히 드라마를 애정했던 만큼 마지막화에서 절로 탄식이 나왔었다.
만약에, 어디까지나 만약이다. 만약 진양철의 퇴장 이후 이들 오너 일가들의 본격적인 고도의 정치적 싸움을 전개했더라면 어땠을까. 진양철이라는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기 전까지는 발톱과 욕망을 감추고 숨죽이며 지내다가, 진양철의 죽음을 분기점으로 그들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면서 처절하고 참혹한 권력투쟁의 서사를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그들도 분명 젊었을 적에 진양철의 경영 수업을 받았을 것이며 진양철의 삶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후반부는 각각의 오너 일가 캐릭터가 전반부가 퇴장한 진양철의 어떤 일면을 표상하는 형태의 서사였더라면 어땠을까. 산을 통치하는 호랑이가 사라지고 나면, 그 산은 그때까지 숨죽이던 늑대들이 야성을 일깨우고 치열한 영역다툼을 시작한다고들 한다. 그런 의미에서 2부의 내용 전반이 대적자들이 오너 개개인에 잠재된 포스트 진양철과 싸우는 양상들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즉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각자의 지적 능력과 경영능력을 뽐내다가 마지막에는 끝내 진도준에게 패배하는 서사로 마무리되면서, 이야기의 줄기를 왕좌의 진정한 계승과 재벌 내의 잔혹한 권력다툼으로 승화했더라면 충분히 좋은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여기까지 이뤄내지 못하더라도 오너 일가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이끌어내는 데에 치중했더라면 작품의 완성도는 무척 높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인 만큼 어쩌겠는가. 특히나 배우들이 작중 캐릭터들을 도맡아 연기를 탁월하게 열연해낸 만큼, 좋은 드라마로 발돋음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기에 다른 드라마들보다 더욱 아쉬웠던 것 같다. 다음 번에 좋은 드라마로 만나볼 수 있길 기원할 뿐이다.
짧은 글을 마치며. 그럼에도 나는 웹소설이 드라마화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무척 고무되는 일이며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더욱 많은 웹소설들이 드라마화되고, 그 역으로 웹소설 또한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아무래도 칼럼 시리즈를 써야만 하는 이유가 좀 더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