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의 외딴 성

일본영화

by 강물처럼


곧 떠나야 하는데 할 말이 남았다. 그렇게 남은 말, 세상에는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못한 말들이 떠돈다. '다녀오겠다'던 말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고 '사랑한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은 주인 잃은 애완동물처럼 길거리를 헤맨다. '돌아갈 거야', 나뭇가지에 걸린 그 말이 다치지 않게 꺼내면서 온 신경을 다 쓰느라 피곤해졌다. 봄이 되면 냇가에도 반쯤 물에 젖은 말들이 파닥거린다. '건강해야 돼', '좋아한다', '미안했다' 바람도 고백도 후회 같은 말들도 땅이 풀리면서 모습을 드러낸다. 새싹처럼 사람들이 남긴 말들이 파릇파릇 돋는다.

어깨에 가방을 하나 둘러메고 그 말들을 주우러 다닌다. 유령처럼, 영혼처럼 사람은 없고 그 사람이 다 하지 못한 말들을 여섯 개쯤 모으면 한 번씩 소원을 빈다. 내 오체투지는 여섯 걸음을 가고 땅에 엎드려 소원을 비는 것, 여섯 사람의 소원을 하나씩 묶어서 밤하늘에 날린다. 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남긴 말들이 별에 가 닿는다. 별이었던 사람이 별에게 남긴 말들을 전한다. 거울 속의 외딴 성을 봤다. 내 주위의 사람들, 나와 같은 별에서 온 아들과 딸, 아내는 무슨 소원을 품고 있을까,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서로 모르던 여섯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때쯤 알 것이다. 별이 가진 소원을 함께 나눴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키의 소원은 코코로의 소원이 되고 코코로는 리온의 소원이 되는 것이다. 소원은 그래야 한다고 넌지시 깨우친다. 소원은 무엇이냐고 누가 묻기만 하면 금방 대답해 줄 것 같았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는 곰곰해졌다. 누구나 외딴 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만져졌다. 청산도에 다녀오던 12월, 사람들도 나도 섬처럼 살고 있다고 끄덕이며 바다 앞에 섰던 날이 떠올랐다. 외딴 섬, 외딴 성, 외딴 곳, 현실이든 영화든 성경 속에서든 우리는 모두 거기에 있다. 빌딩숲이라고 외롭지 않을까. 학교, 교실이라고 다를 수 있을까. 물론 우리가 사는 집도 거기에 있다. 모두들 아픈 사람들 -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나가히사 스바루 69년생, 이오우에 아키코 76년생, 안자이 코코로 92년생, 미즈모리 리온 92년생, 마사무네 아스 98년생, 하세가와 후카 2005년생, 우레시노 하루카 2013년생 - 영화에서 만난 말들이 진동과 함께 마음에 전해져 왔다. 스바루는 자기보다 훨씬 훗날을 살아가는 하루카를 향해, 먼 미래에도 나와 같이 힘들어하는 네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때에도 등교 거부가 있고 나처럼 외로운 네가 있는 세상이라니.

외딴 성에 간다. 학교에 갈 시간에 거기를 찾아간다. 어른이라면 일하러 갈 시간이다. 거울로 통하는 거기는 산만하지 않다. 가고 오는 시간만 유일하게 지켜야 할 규칙인데도 평온하다. 그에 비하면 이 세계는 온통 규칙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조약이 있고 국제법이 있어도 전쟁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치열한 살육전이 벌어지고 아이들은 경쟁으로 치닫는다. 이 땅에서의 소원은 살아남는 것이다. 그 소원을 외면하거나 거부하면 외딴 곳밖에는 갈 데가 없다. 외딴 곳에 진짜 소원이 있다는 스토리는 그래서 고전적이며 인간적이다. 인간적인 것이야말로 감동적이다. 부처님 말씀처럼 세속적인 세상은 산만하다. 산만해서는 좀처럼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 코코로는 마음心이라는 뜻이다. 주인공 코코로는 실컷 예민하고 마음껏 배려한다.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느라 제대로 학교에 나가지 못하지만 - 그래서 사나다가 몸서리쳐질 정도로 싫지만 - 자신의 증오보다 더 소중한 것을 위해 견딘다. 외딴 성에서 지냈던 1년 동안의 기억을 소원 하나와 바꾸기를 거부한다. 코코로는 아키를 살리고 모두를 회복시킨다. 회복回復,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는 일. 그것이 소원이라니, 대수롭지 않은 인생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겨우 그거였다니, 놀라야 하나.

나에게도 회복해야 할 장소와 시간이 있다. 거기를 돌려주고 싶다. 너무 오랫동안 갖고 다녔던 것 같다. 이제 그 말과 함께 돌려준다.

バカみたいだよね。

たかが学校のことなのにね。


"바보 같이"

"그래봤자 학교잖아."

티베트, '푸른 옥빛의 호수' 암드록쵸, 라싸에서 거기 가는 길에 마주쳤던 타르초, 소원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파란 하늘, 노란 땅, 빨간 불, 하얀 구름, 초록 바다가 펄럭이며 라마교의 경전과 내가 한 곳에 있었다. 한 글자도 읽지 못하는 글자를 오래 바라보며 그 말들의 주인을 기억하고 바람에 태워 말을 날리는 영혼에게 인사를 했다. 돌 하나를 길가 돌더미 위에 얹어 놓으며 읊조렸다.


"기껏해야"


나를 떠나서 우주 끝으로 날아가고 있는 말에는 다 지워진 내가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불렀다. 소원이 하나로 엮였다. 바람의 소원, 사람들의 소원, 내가 간직한 소원, 모두가 투명해서 저절로 눈물이 났다. 다시 거기에 가서 호수를 거닐다가 돌아올 때쯤 나는 얼마나 멀리 가 있을까.

영화를 두 번 봤다. 한 번은 셋이서, 또 한 번은 넷이서. 모두 말이 없었다. 처음 본 아들도 두 번째 본 딸도, 아내도 나도 감동만 했다. 얕은 물에서도 재미나게 놀고 나온 모습들이다. 그래, 기껏해야 애니메이션 아닌가.

기껏해야(たかが) , 어쩌면 견디기 힘든 말인 줄도 모른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하나인 것도 책 하나를 읽으면서 배운다.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와 글자들이 어느 순간 나를 이끌고 앞서 간다. 글을 쓰면서도 똑같은 작용이 일어난다. 글자를 겨우 찾아서 끼워 맞추는 데 하루를 다 들이지만 그만그만한 삶에도 솟구치는 고마움이 있어서 모퉁이 같은 데에서 당황하지 않고 돌아 나오는 용기를 준다. 용기를 내면 즐거워지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늘 감동적이다. 용기가 없어서 스스로 자폐적인 감성에 파묻히는 우리 시대의 수많은 외톨이들에게 영화를 선물로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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