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저녁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반장님' 댁에 찾아갔다. 계단을 올라가 3층, 입구에 들어서면서 들었던 그 댁의 첫인상은 '외로웠겠구나'였다. 정갈하다거나 집이 넓고 좋다, 그런 말은 되려 형식적일 것 같고 이 밝고 환한 공간을 예순이 훌쩍 넘은 사내 혼자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쓸쓸하게 만져졌다. 어지럽게 흐트러뜨리지 않고 사느라 애쓰는 흔적을 확인하는 듯했다. 생일이라고 친분이 두터운 것도 아니고 오래 알고 지낸 막역한 사이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이 찾아오는 그런 것과 얼추 닮아 보였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시던데 짝을 만난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저런 설렘이었을 텐데.... 싶었다.
재미 삼아 3행시를 지어서 '그분'에게 선물하시라고 코치했다.
김밥에 사이다 한 병 나눠 마시며
영덕 바닷가에 다녀오는 길
희어진 옆머리가 오늘따라 눈이 부시네
나이가 들었어도 마음이며 바람이 소박한 것을 표현했다. 옛날 추억이 되살아 날 것 같은 단어를 골랐다. 그리고 경상도 포항에 사신다는 말에 일부러 영덕 바닷가를 꺼냈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 동해안에 몇 안 되는 이름이다. 공감각적 인상을 간직한 항구 이름, 구룡포나 삼척, 동해, 그런 이름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적인 매력이 풍기는 곳이다. 마지막 문장은 일종의 고백이 된다. 말하고 싶은데 말로 하기는 어쩐지 낯부끄러운 그런 마음을 짧게 그러면서 분명하게 드러냈다. 나도 은근히 반장님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반장님을 사실 잘 모른다. 아내가 일하는 사무실에 근무하는 분이고 누구나 다 반장님 그래서 나도 반장님 그런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직책과 잘 어울리는 사람, 별명이나 애칭과 잘 섞이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바보 노무현, 나는 그 이름이 참 보기 좋고 듣기 좋아서 한편 부러운 생각도 든다. 몇 번 뵌 적은 없지만 반장님은 '반장님' 다워서 좋다. 선생님도 그렇고 사장님도, 신부님이나 목사님, 스님도 정말 그 이름이 어울리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입안의 혀가 돌돌 구르면서 발음이 된다. 바리케이드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이 물 흐르듯, 연잎에 빗방울 구르듯이 선생님, 사장님, 신부님, 목사님, 스님 그러면서 내가 꼬마가 된다. 엄마나 아빠라는 이름도 그런 것을...... 우리 아이들이 나를 부를 때 그 마음을 먼저 듣는다. 길을 가다가도 마트에서도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부르는 소리를 바라본다. 아빠라는 음성 하나에 색과 모양이 모두 다르다. 속도도 다르다. 이륙하고 착륙하는 그 부드러움도 모두 다르다. 저 아빠에게 잘 도착하는 이 '아빠'라는 호명을 보고 있으면 종이비행기가 사뿐히 날아가는 모습이다. 저기에도 많은 것들을 실을 수 있구나...
무겁지 않고 가볍지 않은 무게와 질감이 좋다. 색이 어울리면 예뻐 보인다. 이름은 그런 맛이 있어야 좋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리고 남의 집이었지만 그리고 좀처럼 없는 일이었지만 편했다. 청소하시던 여사님이 만들어 오신 찰밥도 맛있었고 갖가지 나물에 입이 즐거웠다. 일부러 나를 위해 캔맥주도 하나 준비하셨던가 본데 에일 Ale 맥주여서 반가웠다. 보통 우리가 흔하게 마시는 맥주는 라거 lagar라고 그러는데 라거맥주에 비해 에일은 탄산이 적다. 그래서 무거운 맛이 나는 탓에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별로지만 - 나는 뭘 가리지 않는 편이라 - 어제 오랜만에 반가웠다. 반장님이 가끔 '궁합'이 맞는다며 나를 반기는데 이런 것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우연히 그랬던 것뿐인데 그것이 상대에게 좋게 전달되는 것, 의미가 되어 때로는 뜻밖의 횡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고수는 호불호가 갈리는 채소 중에 하나다. 나는 역시나 그 중간에 있다. 반장님은 고수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은 못 먹는다고 하는데 나는 먹는다. 그래서 또 고수 맛을 오랜만에 봤다. 2시간 머물다 일어섰지만 자분자분하니 속삭이며 보낸 저녁 같아서 편안했다. 거기 둘러앉은 네 사람이 반장님 연애 이야기를 재밌게 들어가면서 나름 또 작전도 짜고 각자 전망도 꺼내놨다. 연애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해서 흥미롭다. 그게 누구든지, 어떻게 됐나 싶어서 사람을 간지럽히는 구석이 있다.
비가 내리는 거리를 지나 돌아왔다. 며칠째 비가 내린다. 봄비, 이은하가 불렀던 그 노래가 조용히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