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까지 가서 2박 3일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산이는 웃겼다. 아빠한테 말했냐며 엄마한테 두 번이나 확인하더니 끝내 말도 없이 새벽 도주(야반도주는 아니었다.)를 감행했던 아이치고는 당돌하다. 아침잠이 많아서 꾸물대는 아이가 새벽 6시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꿈틀대며 기다렸을 1분 1초가 눈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엄마, 아빠한테 말했어?"
"아니, 아직 말 안 했어."
"말을 못 한 거겠지, 안 한 게 아니고."
아무리 방학 동안에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학원에 빠지지 않았다고 그래도 2박 3일은 어쩐지 눈치가 보였던가 보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다른 때 같으면 손도 좀 벌리면서 돈이 얼마 부족하다든지, 얼마 있으면 좋겠다고 먼저 이야기를 걸어오던 것이 아예 싹 사라지고 없었다. 나도 얼핏 친구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연히 하룻밤 자고 오는 정도로 알아들었다가 다시 물었으니까.
"2박 3일 간다고?"
마침 성당에 미사 가던 길, 신호등 앞이어서 다행이었던 거 같다. 돌아보면 우리 삶에는 그'래'서' 다행이었던 일들과 그'래'서' 좋지 않았던 일들이 자갈돌처럼 깔려 있다. 크고 작은 돌들이 촘촘하게 깔려 사람이든 말이든 달릴 수 있게 고대 로마 사람들이 정성 들여 닦은 도로가 떠오르기도 하고 또 우리네 시골, 고샅길이 연상되기도 한다. 군데군데 잡초 한 포기씩 자라고 있어서 눈길이 가던 골목에서 한두 개씩 발에 채던 돌멩이들. 돌이 무슨 잘못인가.
신호등이 바뀌는 동안 나는 아마 허락했던 거 같다. 대신 말없이 성당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미사를 보기 전에 고백성사를 봤다. 왜 그랬을까. 사실 아무 계획이 없이 고백 성사를 보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배웠다. 미리 준비하고, 그 준비를 통하여 사람이 값을 치르는 것이다. 부끄러움도 후회도 반성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맛보고 경험하는 결과물이 된다. 더 나아가 내일에 대한 설계나 계획, 변화를 도모하고 그것을 또 예비하는 동작이 고백 성사 전에 이미 진행되는 거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부님 앞에서 일종의 '확인'을 받고 '약속'을 하는 것이다. 다짐이라고 해도 좋을 1분짜리 '의식'이 그 순간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부터 나에게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즉각 반응, 고해소가 보이면 거기 앞에 가서 기다리는 것이다. 1초의 망설임이 없다. 일단 그쪽에 앉는다. 길을 걷다가 성당이 있으면 거기가 고백성사를 보기에 제일 좋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상에서 벗어날 시기가 되면 길을 따라다니면서 만나는 성당을 다 스케치해보고 싶다.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미사도 보면서 고해소에도 들어가 무릎 꿇고 신부님과 대화를 나눌 것을 상상하면 건강해야지 싶어 진다.
친구네 집에서 두 밤을 자고 3일째 언제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른 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날 아침에서야 아내와 둘이 아침을 먹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제 오후에 익산역에 내려서 학원 수업받고 늦게 들어와 자고 있다면서 인천은 멀어서 다시 못 가겠다고 산이가 그랬단다. 그러면서 엄마 병원에 다녀온 것도 아빠하고 엄마 둘이서 영화 본 것도 강이가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줬단다.
"아빠가 영화 보면서 울었대."
"정말? 아빠는 안 우는데?"
강이와 산이는 쿵짝이 잘 맞는다. 둘이서 내 흉내를 내면서 깔깔거리는 통에 아내도 한바탕 웃고 말았다며, 아이들 흉내를 낸다.
"이렇게, 아빠가 울었다면 이렇게 울었을 거래요."
양손으로 번갈아 가며 눈꼬리만 슬쩍 훔치는 시늉을 하며 또 웃는다.
"그러면서 뭐라는 줄 알아요."
그러다가 엄마가 쳐다보면 아빠는 그랬을 거라며,
"왜? 영화나 봐."
어쩜 그렇게 우리 얘들은 관찰력이 좋은지 모른다며 또 웃어댄다.
영화, '소풍'을 보면서 나는 그것보다 열 배는 더 눈물이 났을 것이다. 손수건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니까. 그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하루가 무심히 지나갔다. 3월 1일에 걷기로 했던 둘레길은 다음으로 미뤘다. 둘레길 21코스가 끝에 가까워지면서 우리도 자세가 바뀐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내는 오른쪽 하복부가 불편하다면서 남은 6개 코스 중에서 평지가 많은 곳으로 걷자고 그러는 것이다. 15코스를 마치면서 나도 올해 둘레길을 완주하고 그것을 얼개 삼아 책을 엮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목표가 생긴 것이 나쁜 것은 아닌데 지금까지 걷던 우리의 모습하고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은 활력일 수도 있으면서 욕심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욕심이어도 좋은데 중요한 것은 우리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평화롭게, 그게 대수냐 싶은 마음으로 걸어왔지 않나. 날씨가 궂으면 못 걷고, 시간이 안 되면 못 오고, 일 년에 두 번도 좋고 세 번 올 수 있으면 운이 좋다고 여기지 않았던가. 나부터 태세를 전환한다.
21년 3월 1일에는 비가 내려서 밖에 나가지 못하고 이렇게 적었다.
이웃한 딸네서 손녀가 태어나고 그 애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주말이면 딸네와 어울려 남한산성에 더 자주 가게 되었다. 아이는 어떤 꽃보다도 예쁘게 자랐고, 시냇물 소리보다 더 즐겁게 웃었다.
나도 따라서 자주 웃었다. 내가 다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웃음을 웃게 될 줄이야.
아마 외아들을 잃은 지 삼 년쯤 될 무렵이었을 것이다.
참척의 고통을 겪으면서 내가 앞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웃음을 웃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잃은 기둥에 비해 그 아이는 겨우 콩 꼬투리만 하였으나 생명의 무게에 있어서는 동등했다. 생전 위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이 새로운 생명에 의해 위로받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 박완서, 나는 다만 바퀴 없는 이들의 편이다.
그러면서 끝에 붙인 말은, 나의 허술하고 서툰 방식으로 손바닥만 한 봄을 전합니다.
3월 1일은 그런 날이다. 봄을 전하고픈 날. 22년 3월 1일에는 1코스를 걸었고 이듬해 3월 1일에는 8코스에 우리가 있었다. 다시금 깨닫는다. 가고 싶은 마음이 쌓고 갈 수 있는 행운이 그 위를 쓸고 그러고 나서 거기에 있는 나, 살아가는 일도 이처럼 삼위일체다. 무엇 하나 허투루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그냥'은 없다. 그냥이었어도 '그냥'은 아니었다고 끄덕인다.
산이나 강이는 내가 절대 울지 않는 사람쯤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좋다. 늘 자기들 엄마를 옆에 세워놓고 나를 관찰하는 사람들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엄마가 바다 같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나도 어디 가면 사람 좋다는 말 듣는다고 덤비려다가 그만뒀다. 나도 눈물 있다고 써 붙여놓으려다 말았다. 얘들 같이...
고해소에 들어가면 내 편이 되어 주는 무기가 하나 있다. 신자들은 잘 알 것이다. 어릴 적 수덕이하고 장난치면서 그 말에 서로 동감했던 적이 있다.
"제일 안 좋은 것은 말 안 해도 돼.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고백하오니 사하여 주십시오."
"맞아, 맞아, 맞아, 그래, 그거 있지!"
우리는 어렸어도 그것을 알았던 것 아닐까. 말하지 못하는 것과 말 못 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시는 아버지.
내가 믿는 종교는 그 눈빛이며 그 품이다.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I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 while with me. 그래, You raise me up, 그 노래.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우울하고 영혼이 지칠 때, 괴로움이 밀려와서 마음이 무거울 때, 그럴 때, 여기 침묵 속에서 기다립니다. 당신이 와서 제 곁에 앉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