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어디로?

이상한 걸음

by 강물처럼


곧 겨울 방학도 끝난다.

어제는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2월 29일이었다. 오늘 하루를 걷고 주말을 쉬고 나면 개학이다. 마라톤 같은 레이스의 시작이다. 서두르고 빠뜨리고 재촉하는 아침, 그 속에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아이러니는 하나의 묘미다. 그래 본 사람들만 아는 특별한 맛이다. 3월 1일에 계획대로 출발할 줄만 아는 아이들이 늦은 아침을 먹고 있다. 그야말로 브런치다.

그 전날, 그러니까 28일 밤에 아내와 이야기를 나눴다.

작년 여름처럼 그러면 안 된다고 말을 꺼냈다. 분위기 때문에 참고 걷느라 나중에 더 아프면 곤란하다고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켰다. 그때도 하루 걷고 와서 3일을 앓아누웠던 것이다. 출발 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생각보다 오래 걸린 산행에 몸이 지쳐버린 것이다. 8월, 하동호 근처에 있는 리조트 야외 수영장에서 사람들이 떠들며 즐기던 소리가 멀리서도 들리던 날이었다.

15코스 내리막에서 평소보다 힘이 더 들었던 탓인지 그날 이후로 오른쪽 하복부가 당기고 아프다고 그랬다. 어느 날은 괜찮다가 어느 날은 갑자기 더 아픈 것이 신경 쓰였다. 결국 병원을 찾아가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이상이 없다는 소견과 며칠 분의 약을 처방받았다. 요로결석이 의심되기도 한다는 말에 영문도 모르고 걱정했던 때보다 차라리 편했다. 하필 몇 년 전에 수술받았던 자리라 수술 후유증은 아닐까 하며 심란하던 것이 조금은 가라앉은 상태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내가 보니까, 많이 괜찮아졌거든요. 8~90%는 좋아진 것 같아."

우리는 16코스를 계획했었다. 난이도 상, 가탄에서 송정 10.6km는 어느 쪽에서 걷든 힘든 코스다. 그래서 3월 1일 금요일에 걷고 주말을 잘 쉴 생각이었다. 학교 다니면 이런 스케줄이 잘 나오지 않으니까 지금이 기회라고 봤다. 그러던 것이 아내의 상태 때문에 이번에 16코스는 힘들겠다고 의견을 모았던 터다. 자, 이제 내 의견이 남았다.

"상태가 완전한 것도 아닌데 - 그러면서 긴 서사를 풀어냈다, 우리가 걸어왔던 과정을 하나씩 들춰보는 그런 서사. - 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좀 아쉬워서 그렇지, 뭐."

그러기로 했다. 대신 나한테는 다른 기회가 주어졌다. 용인에 사는 친구하고 하룻길 어떨까 싶은····.

다음날 - 그러니까 어제 29일 - 아침 시간에 전날 일을 정리하면서 친구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개학 준비 중이어서 눈코 뜰 새 없다는 회신. 답장을 받고 나서, 그야말로 '브런치'를 먹고 있는 아이들 앞.

어떤 때는 간단하게 중요한 말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있다. 짧은 말이 긴박한 상황을 전달하기에 좋다.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탁자 위에 양손을 걸치고 마치 심사숙고하느라 피곤하다는 듯이 마른세수를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마지막에는 머리까지 손을 올려 양쪽으로 훑어내린다. 그때까지 눈을 감고 마지막에는 고개를 하늘로 쳐든다. 아직 눈을 감고 있다.)

"엄마는 병원에 다녀왔는데 괜찮다고 그러거든. 그런데 쉬었으면 하는데'도' 엄마가 내일 걷고 싶대."

아, 나는 왜 이렇게 고백성사 받을 짓을 하고 말까. 분명히 어제 우리는 3월 1일에 쉬자고 그랬었는데 지금 나는 엄마가 걷고 싶'대', 그런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엄마 편을 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거든. 대신 엄마한테는 모른 척하고 6킬로나 7킬로만 걷는 거지."

산이와 강이는 엄마 편을 들자고 하면 그러자고 하는 얘들이라, 좀 싱거운 구석이 있다. 따질 것은 따져야 하는데 녀석들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실천한다. 아끼고 보듬는 것이 서로들 보통이 아니다. 가끔 눈꼴 시릴 때도 있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섬이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그저 섬이다. 제주도, 산토리니, 피피섬, 하와이같이 사람들이 놀러 가는 데도 아니고 덩그러니 떠있는 아일랜드. 힝,

다시 29일, 어젯밤 거실에서 아내와 둘, 아내는 망고가 아주 맛있게 익었다며 칼집을 냈다. 네모 반듯한 것을 하나씩 떼어먹고 있는데 강이가 방에서 나왔다. 세 사람의 머리 위로 전등 빛이 따스하게 내리고 있었다. (먼저 강이에게 눈으로 사인을 보냈다. 강이도 사인을 받았다는 사인을 또 보냈다. 나도 알겠다고 또 보냈다. 강이도 또 알았다고 그랬다.)

"얘들이 내일 걷자고 그러던데?"

이번에는 간격을 뒀다. 막 나아가지 않고 기다렸다. (망고 노란 향이 입안에서 코, 이마, 위쪽으로 번져갔다.)

산이 강이도 이제 커서, 해오던 것이 있어서, 그러는 거다며 아내는 강이에게 망고를 하나 더 권한다. 비싸서 못 사 먹는데 산이는 망고 두 개를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그랬다며 웃는다. 그런 소원들이 있다. 누가 들으면 재미있어서 웃기는 귀여운 소원들이 사람들은 있다. 나중에 돈 벌면 요구르트를 한꺼번에 백 개쯤 사서 플라스틱 바가지에 다 담아서 마셔야겠다고 소원했었는데 그 어릴 적 소원을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산다.

"그러니까, 나도 그게 좋을 거 같아요. 16킬로짜리 길이 하나 있던데 거기를 하루에는 다 못 걷지, 평지라고 해도 다음날 학교 가고 그러면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를 좀 걸어두면 괜찮을 거 같아요."

어제 29일부터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다. 일기예보에는 주말에 큰 추위가 올 거라고 그런다. 오늘(지금은 3월 1일 오전 7시 04분) 기온은 영하 2도, 대체로 흐린 하늘이다. 걷기에 좋다고 볼 수 없는 상태다. 곧 식구들이 깨어날 것이다. 세 사람은 모른다. 내가 이렇게 하고 저렇게 꾸민 것을. 과연 오늘 하루가 다 지나서는 어떤 표정들일까. 나는 오늘 걸으러 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걷는다. 이상한 걸음을 걸어보는 날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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